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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서울소리’에 반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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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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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야에 묻힌 전설적인 소리꾼들을 발굴해온 서울소리보존회의 새 출발
창립공연과 함께 김옥심 명창 CD 발간 “국악계의 시민단체가 되겠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그러니까 10년 전의 일이다. 서울 청계천 고서점 거리를 지나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정선 아리랑’에 이끌려 중고 LP 매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학 신입생 때 전남 진도로 답사를 갔다가 씻김굿에서 느꼈던 장엄한 대서사시의 감흥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다짜고짜 소리꾼이 누구인지 물었더니 주인은 “소리가 옥구슬 굴러가는 듯해서 방물목이라 불렸던 김옥심”이라고 했다. 그렇게 경기민요의 전설적인 소리꾼 김옥심(1925~88) 명창을 만난 김문성(언론중재위원회 조사연구팀)씨는 초야에 묻힌 소리꾼들을 하나둘씩 불러내기 시작했다.

인간문화재가 못 된 명창들


우여곡절 끝에 김문성씨가 찾아낸 ‘재야 명창’이 남혜숙 명창과 유명순 명창이었다. 이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로 지정예고된 4명창 가운데 유일하게 탈락한 김옥심 명창 곁을 끝까지 지킨 소리꾼이었다. 가까스로 재야 명창을 세상 속으로 불러낸 김씨는 1999년 ‘고 김옥심 추모사업회’를 결성하고 다음해에는 ‘쌈짓돈’을 털어 국립국악원에서 김옥심 명창을 추모하는 공연을 마련했다. 인간문화재 지정에서 탈락한 뒤 모습을 드러낼 자리를 갖지 못하던 재야 명창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한 이날 공연을 계기로 김씨는 또 다른 불세출의 소리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 김옥심 명창(맨 왼쪽) 추모 공연을 하는 유명순, 남혜숙, 김현미 명창(가운데 사진 왼쪽부터). 국악방송에서 <김민성의 신민요 80년>을 진행하는 김문성 사무국장.

사실 김옥심 명창은 1960년대까지 이은주 명창(경기민요 보유자)과 함께 절정의 인기를 누린 국악인이었다. 그럼에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보유자 후보로 올려놓고도 심사 당시 예능계를 떠나 있었다는 ‘애매한’ 이유로 보유자 지정에서 탈락시켜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이에 견줘 이소향(1916~87) 명창과 이진홍(1907~84) 명창은 경기민요 보유자 지정 때 후보에서마저 배제된 비운의 소리꾼이었다. 그나마 이소향 명창은 1982년 국악협회가 제정한 ‘재야인간문화재’ 공로패를 받아 잠시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이진홍 명창에게는 재평가 기회조차 없었다.

이렇게 김씨가 인간문화재 밖의 재야 명창들을 만나면서 경기민요로 정형화된 서울소리의 맥을 찾게 됐다. 서울에서 널리 불리던 잡가와 경제시조, 가사, 민요 등의 소리를 오롯이 후대에게 전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명창들의 소리를 접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게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봄 김씨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됐다. 한 희귀 음반 소장자가 축음기 음반 2천여 장을 급매물로 내놨다는 것이다. 또다시 김씨는 사고를 쳤다. 결혼자금에 대출까지 받아 음반 절반 분량을 구입한 것이다. 서울소리의 혼이 담긴 음반을 떠돌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서울소리는 먼지 틈새에 숨어 있지 않을 듯하다. 지난해 8월 창립총회를 연 서울소리보존회(이사장 남혜숙)가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가받아 지난 1월21일 창립기념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엔 남·유 명창 등 실기인들이 다수 참여하며 이동석 청주대 교수, 법무법인 정성 대표 양종윤 변호사, 국악 그룹 바이날로그의 양승환씨 등 4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한다. 보존회의 사무국장을 맡은 김씨는 벌써부터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 우선 아쉬운 대로 창립 공연을 마련하고, 하반기에는 판소리의 박초선, 민요의 남혜숙·유명순, 정가시조의 서현숙 등 살아 있는 재야 명인들의 예술세계를 조명할 계획도 세웠다.

이런 서울소리 관련 공연과 함께 보존을 위한 활동도 이뤄진다. 예컨대 작고한 재야 명창들의 음원과 사진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음반이 있는 자료집을 펴내고, 김옥심 명창이 남긴 30여 장 분량의 CD 가운데 일부를 추려내 5장의 CD에 담을 예정이다. 요즘 매달 수십만원의 이자를 내는 김씨의 소리 사랑은 끝이 없을 듯하다. “서울소리를 체계적으로 보존하면서 국악계의 시민단체 구실을 하려고 한다. 보유자 지정 제도로 인해 소외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이 있다. 현행 제도가 100% 완벽할 리 없다. 적절히 목소리를 내면서 국악계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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