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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전통춤의 재발견, 창무회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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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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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사위의 고정관념 벗어던지고 한국 창작춤 개척해온 창무예술원
한국 현대예술에서 이렇게 고유의 장르를 개척한 예가 있던가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한국 창작춤의 활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요즘 창무예술원 이사장 김매자(62)씨는 ‘창무 한국 창작춤 메소드’ 공연을 준비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실에 걸맞은 창작춤을 선보이려고 창무회(예술감독 김선미)를 설립한 게 30년 전의 일이다. 이를 축하하려는 것이었을까. 프랑스 리옹의 ‘메종 드 라 당스’(무용의 집)는 2005·2006 시즌에 그의 작품 <심청>을 초청해 오는 4월12일부터 3일 동안 공연하도록 했다. 지구촌에서 무용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꿈의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때문이다.

1977년, 고쟁이 차림으로 무대 뒹굴다


창무회는 오래된 전통에 당대성을 입힌 창작춤으로 한국무용사에 한 획을 그었다. 김매자 이사장이 '창무 한국 창작춤 메소드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의 동작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 박승화 기자)

“그동안 지속적으로 해외 공연을 하면서 한국 창작춤의 국제적 경쟁력을 키워왔다. 이번에 메종 드 라 당스 무대에 초청받은 것은 창무회를 통해 한국무용이 세계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 티켓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관 주도로 국내 무용단을 해외 무대에 여러 차례 파견했지만 그때마다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예산과 조직이 충분히 뒷받침되더라도 촌스러움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순수 민간 차원의 무용단체가 새로운 춤 어휘를 만들면서 세계적인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은 빛나는 성과로 여길 만하다.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창무회를 빼놓고 한국 창작춤의 미래를 말하기 어렵다. 한국 창작춤의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창무회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매자씨와 제자들이 ‘창작무용연구회’라는 뜻에서 창무회를 1976년 12월에 설립한 것은 한국무용사에 하나의 전환점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용평론가 김태원(한국춤평론가협회 회장)씨는 “창무회는 신무용의 결점을 극복하면서 창작춤 운동을 주도해왔다. 현대무용의 서양 것을 흉내내거나 전통과 현대를 버무리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 창작춤이라는 고유의 장르를 주도적으로 개척했다. 한국 현대예술에서 고유한 장르를 만들어낸 것은 한국 창작춤이 유일하며, 무용 교육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사실 창무회의 미래는 김매자씨가 <한 저편에서>(1977)라는 춤을 추면서 예고됐다. 당시 김씨는 한국춤 공연을 하면서 고쟁이 차림으로 무대를 뒹굴기도 했다. 단아한 전통춤에 익숙한 무용가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이사도라 덩컨이 토슈즈를 벗었던 것처럼 김씨가 버선과 치마저고리를 내던진 것을 두고 ‘미친 춤’이라 평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전통에 관한 인문학적 토론에 꾸준히 참가하고 민속의 원형을 간직한 굿의 현장을 찾으면서 새롭게 우리 것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진정으로 민중의 삶에 가까운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살풀이와 승무 등으로 표현되는 것은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창무회의 이론적 연구를 토대로 공동 창작 시스템제를 도입해 무대에 올린 <도르래>(1981)와 <소리사위>(1981)는 한국 창작춤의 새로운 전형을 제기한 것이었다. <도르래>는 만남과 헤어짐, 탄생과 죽음 등의 형이상학적 주제를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호흡에 의한 표현 위주의 기법으로 담아냈고, <소리사위>는 군화 소리, 자동차 클랙슨 소리, 태엽 소리 등 일상적 소음을 효과음으로 삼아 도시인의 메마른 감성을 한껏 표현했다. 이런 창무회의 창작춤은 전통춤의 기법을 원용하면서도 새로운 기법으로 ‘당대성’을 갖도록 하면서 여전히 주류춤 구실을 하던 신무용의 입지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갔다.

1988년 올림픽 폐막식 행사 <떠나가는 배>

한국 창작춤의 새로운 원형을 제시한 김매자씨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이미 대학교수로서 한국무용계에서 ‘간판’ 구실을 하던 그였지만 뉴욕대 박사과정에 입학해서는 ‘견습생’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한국춤’이었다. 그야말로 도를 닦는 심정으로 한국의 몸짓을 소화하면서 서양의 것으로는 넘볼 수 없는 우리 것을 발견했다. “김매자류 춤은 ‘호흡’이 관건이다. 우주의 기와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손동작 하나하나가 호흡에서 나온다. 서양춤에서 손동작은 공간을 나누지만 우리의 춤사위에서는 땅과 하늘을 포용하는 식으로 표현된다. 이것을 창작춤에 적용하면서 한국춤의 가능성을 인정받게 됐다.”

이렇듯 창무회의 한국 창작춤은 전통을 현대의 삶에 맞게 수용하면서 근래에는 ‘컨템포러리 코리아 댄스’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신무용의 틀을 깨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창무회에 속한 무용수들이 버선을 던지고 맨발로 무대를 휘돌면서 신체 움직임의 세밀한 부분과 감정의 질감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한국춤에 제기되던 표현의 한계를 떨쳐낸 것은 의미 있는 수확이었다. 실험적인 조명이나 기발한 도구 등 무대장치에까지 신경쓰고, 주제에 걸맞은 분위기 연출을 위해 창작음악을 도입하기도 했다. 전통춤의 고정된 패턴에서 벗어나면서 폭넓은 미적 감각이 창출된 셈이다.

메종 드라 당스에 초청된 창무회의 <심청> 공연 모습.

새로운 미적 감각이 만들어지면서 대중과의 소통 통로도 넓어졌다. 1985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공연 소극장으로 개관한 ‘창무춤터’는 실험적 무용공연을 잇따라 무대에 올리면서 젊은 안무가들의 요람 구실을 했다. 이곳에서 한국무용의 표현영역을 넓힌 안무가들이 1990년대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즈음 김매자씨는 88 서울올림픽 폐막식 행사에 <떠나가는 배>를 선보여 축제 양식에서 한국춤의 미학적 해답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김씨의 현대적인 창작춤은 ‘장구춤’과 ‘부채춤’을 대신하는 한국의 대표춤으로 각국의 무대를 섭렵하게 됐다.

그렇다면 창무회는 한국 창작춤의 미래를 어떻게 열어가는 것일까. 이미 창무회는 독자적인 미학과 기획을 통해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 전통춤의 언어를 창조적으로 변형하면서 ‘창무회 스타일’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엔 대학 강단에서 내려온 김매자씨가 설립한 창무예술원(1992)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 ‘창무 인스튜티트’, 국제 교류사업 ‘창무국제예술제’ 등이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전문무용단 창무회는 서양의 현대무용과 경쟁하는 우리의 자생적인 현대무용을 국제무대에 내놓으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메종 드 라 당스 초청 공연 성사 여부는 한국 창작춤의 미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연중 상설 공연으로 매력에 빠져볼까

여전히 우리가 한국 창작춤의 매력에 빠지기는 쉽지 않다. 국제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무용축제가 번듯하게 열려도 대중의 발길을 모으지 못하는 탓이다. 그래서 창무회는 올해 12월까지 매달(셋쨋주 금·토요일) 홍익대 앞 포스트극장에서 한국 창작춤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메소드 상설 공연을 마련하고, 문화소외 지역 사람들과 함께 창작춤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3월부터 운영하려고 한다. 지금은 메종 드 라 당스를 ‘희망사항’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머릿속에 있는 ‘한국 창작춤의 집’이 세계 무용수들의 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 창작춤의 밑바닥을 튼실히 다지는 게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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