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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목숨 걸고 유니폼 바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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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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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동욱의 스포츠 일러스트]

철천지원수팀으로 이적한 고향팀 축구선수들에 원한 사무친 팬들
‘쓰레기 루니’ 낙서에 코너킥 오물 세례, 루니도 피구도 괴롭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박지성을 보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보면서 드는 생각, 루니 정말 잘한다!. 스무 살의 루니는 슈팅부터 패스, 컨트롤까지 뭐든 잘하는 판타지 스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악동 기질로 유명한 루니가 가장 두려워하는 원정 경기는? 맨유의 경쟁자인 첼시, 리버풀과의 경기가 아니고, 에버튼 원정 아닐까. 리버풀 태생의 루니는 고향팀 에버튼의 서포터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에버튼의 열렬한 서포터였다. 루니의 방 창문을 열면 에버튼의 깃발이 보였다고 한다. 루니가 프리미어십 최연소 데뷔 기록을 세운 곳도, 아스날의 30연속 경기 무패 행진을 저지하면서 잉글랜드의 미래로 떠오른 곳도 에버튼의 홈구장 구디슨 파크였다. ‘에버토니언’(Evertonian) 루니의 피는 파랗다.


루니는 에버텐의 파란 유니폼에서 맨유의 붉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다시 파란 유니폼을 입을지도 모른다. (사진/ EPA)

루니는 뼈속까지 파랄 줄 알았는데…

루니는 2004년 9월 에버튼의 파란 유니폼에서 맨유의 붉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이적료 2700만파운드. 에버튼 서포터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같은 해 10월 루니의 집 근처에서는 ‘루니, 죽을 수 있다’ ‘쓰레기 루니’라는 낙서가 발견됐다. 루니는 클럽에서 자신을 배신자라고 욕한 청년을 폭행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에버튼 원정에서 수난은 당연지사. 에버튼 팬들은 루니를 가롯 유다에 비유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당신은 죽었다’(Once Blue, Now Red, In our hearts you are dead)는 펼침막도 보였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필립 네빌은 2005년 맨유에서 에버튼으로 이적했다. 맨유 유스팀 출신인 네빌은 1990년대 맨유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뼛속까지 붉은 선수다. 만약 루니가 에버튼의 연고 라이벌인 리버풀로 갔다면? 낙서가 훨씬 실감나게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FC 바르셀로나의 7번은 레알 마드리드의 10번이 됐다. 루이스 피구는 2000년 당시 역대 최고의 이적료인 5600만달러를 기록하면서 바르셀로나에서 레알로 이적했다. 피구는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누캄프의 영웅이었다. 바르셀로나의 팬들은 레알과 ‘엘 클라시코’ 더비에서 레알 진영을 질주하던 피구를 잊지 못한다. 당시 바르셀로나 서포터스의 이름은 ‘피구’(Figo)였다. 피구의 바르셀로나는 1998~99 시즌까지 프리메라리가를 2연패했다. 피구는 보상을 요구했지만 구단은 냉담했다. 명성에 견줘 낮은 연봉을 받던 피구에게 레알은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레알의 새 구단주 페레즈는 당시 피구에게 걸려 있던 바이아웃(이적료 하한선) 조항의 5600만달러를 모두 지급하며 피구를 데리고 왔다. 피구는 이적 첫해 레알에 4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안겼다. 피구가 레알의 유니폼을 입고 누캄프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살벌했다. 피구는 코너킥을 차기도 힘들었다. 그가 코너로 나가면 돼지 머리가 날아들고, 오물이 투척됐다. 카탈루냐 지역을 대표하는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중심지인 카스티야 지방을 대표하는 레알 마드리드를 ‘철천지원수’로 여긴다. 바르셀로나 팬들은 프랑코 독재 시절, 구단의 이름을 카탈루냐식인 FC 바르셀로나에서 카스티야식인 CF 바르셀로나로 강제 개명당한 역사를 잊지 못한다. 프랑코는 레알의 서포터였다. 아직도 레알은 중앙의 지원을 받는 반면, 바르셀로나는 10만 명의 소시오(Socio)가 이끄는 시민 구단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도 루이스 엔리케의 존재는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위안이었다. 엔리케는 1996년 레알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그는 유독 레알전에 강해서 ‘엘 클라시코의 사나이’로 불렸다. 엔리케는 2004년 바르셀로나에서 은퇴해 영원한 바르셀로나의 전설로 남았다. 최근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는 스트라이커 에토오는 레알에 대한 섭섭함으로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 레알의 선수였던 에토오는 레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마요르카에서 임대생활을 했다. 마요르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에토오를 두고 레알과 바르셀로나가 경쟁했지만, 에토오는 자신을 외면했던 레알 대신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 에토오가 입단한 2004·2005 시즌, 바르셀로나는 프리메라리가 우승컵을 찾아왔다. 피구가 이끌었던 1998·99 시즌 우승 이후 6년 만이었다. 에토오는 우승이 확정되자 “마드리드 녀석들아, 챔피언에게 절을 해라”라는 발언으로 양팀 팬의 감정을 자극했다. 물론 레알 팬들은 홈구장에서 야유로 에토오를 맞이했다.

피구는 바로셀로나의 7번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10번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영웅을 빼앗긴 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사진/ EPA)

토튼햄의 영원한 라이벌, 아스날

이영표가 뛰고 있는 토튼햄 핫스퍼의 라이벌은 아스날이다. 토튼햄의 화이트 하트레인 스타디움과 아스날의 하이버리 스타디움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오랜 라이벌인 두 팀의 경기는 ‘북런던 더비’로 불린다. 아스날은 2003·2004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하필이면 적지인 토튼햄의 스타디움에서 확정지었다. 이날 아스날 팬들은 “숄 캠벨이 왜 화이트 하트레인을 떠났는가?”라는 펼침막을 들고 토튼햄 팬들을 조롱했다. 캠벨이 우승 반지를 끼고 싶어서 토튼햄을 버리고 아스날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 대표팀 센터백인 캠벨은 2001년 자유계약 신분으로 토튼햄에서 아스날로 이적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프랜차이즈 스타 라울도 지역 라이벌인 아틀렌티코 마드리드의 유스팀 출신이다. 아틀렌티코 유스팀이 해체되면서 레알 마드리드로 옮겼다. 아틀렌티코 역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이다. 같은 런던 연고 팀으로 옮긴 선수로는 2005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 2위로 뽑힌 프랭크 램파드가 있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유스팀 출신인 램파드는 2001년 1100만파운드에 첼시로 이적했다. 램파드는 첼시로 이적하면서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그는 아직도 웨스트햄의 홈구장에 들어서면 심한 야유를 받는다. 세월이 흐르면 사랑은 변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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