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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3인의 거인이 골 밑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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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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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프로농구 코트의 새로운 바람 ‘트리플타워’…“국적불명 전술”등 반론도 만만찮아

‘백보드를 장악하는 자가 코트를 지배한다.’

농구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통하는 정설이다. ‘높이’가 생명인 농구에서는 백보드, 즉 골밑을 장악해야 ‘승리’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다는 얘기다.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쉬운 얘기 같지만 가장 소화하기 힘든 진리이기도 하다.

수비에서 매치업 우위를 확보하라


SBS 선두권 진입의 발판. 표필상-리온데릭스-데니스 에드워즈(왼쪽부터).
2000∼2001 애니콜 프로농구는 이런 의미에서 농구판 정설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준 시즌인 것 같다. 바로 높이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트리플타워’(또는 트리플포스트)의 신개념 전술이 올 시즌 프로농구 코트에 적잖은 위력을 발휘하며, 팬들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트리플타워’란 말 그대로 세명의 장신선수가 한꺼번에 골 밑에 투입되어 강도높은 인사이드 플레이를 펼치는 것을 일컫는다. 가드 2명, 포워드 2명, 센터 1명으로 짜인 게 농구의 보편적인 팀 구성인 데 반해 트리플타워는 골 밑에 3명의 빅맨이 버티고 서 있기 때문에 확실히 ‘변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SBS 스타즈의 연승행진으로부터 시작한 ‘트리플타워’ 열풍은 유행병처럼 다른 팀들에 번지면서 2000∼2001시즌 프로농구를 설명하는 새로운 코드가 됐다.

SBS는 중위권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12월21일과 23일 당시 1, 2위를 다투던 양강 삼성과 LG를 연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 때 SBS가 처음으로 들고 나온 카드가 바로 ‘트리플타워’. 리온 데릭스(205㎝)와 데니스 에드워즈(192㎝)의 두 용병에 토종센터 표필상(201㎝)을 가세시켜 골 밑을 완전히 장악하게 한 것이다.

트리플타워를 쓴 첫 번째 이유는 우선 수비에서의 매치업 우위였다. 센터 데릭스로 하여금 삼성 용병 아티머스 매클래리를 전담케 하고 상대 용병센터 호프는 표필상에게 맡겼다. 이로 인해 수비에서 숨통이 트인 에드워즈가 특유의 ‘막슛’을 마음껏 쏘아대며 기분좋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바로 센터 데릭스의 체력 세이브. 평소 데릭스의 약한 체력 때문에 고심했던 김인건 감독은 트리플타워를 쓰면서 데릭스로 하여금 상대 센터와 싸워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에서 벗어나게 했다. 덕분에 데릭스는 정규리그 후반을 향해 치닫는 현재 체력 부담없이 더욱 노련한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삼성전에 이어 LG전에서도 톡톡히 효과를 본 SBS의 막강 ‘트리플타워’는 이후 짭짤한 재미를 보며 팀 역대 최다인 8연승을 질주, 선두권 진입의 발판을 다졌다. 덕분에 표필상은 출장시간을 늘리며 선수생활 이후 최대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SBS로부터 시작된 ‘트리플타워 바람’은 요나 에노사(207㎝)-캔드릭 브룩스(195㎝)-이은호(197㎝·또는 정재헌)의 신세기 빅스와, 대릴 프루(200㎝)-에릭 이버츠(198㎝)-박도경(202㎝)의 LG 세이커스, 그리고 서장훈이 복귀한 SK 나이츠까지 옮겨붙으며 일대 유행이 되었다.

가장 큰 맹점은 ‘스피드 저하’

SK 서장훈-재키 존스-로데릭 하니발(왼쪽부터).
물론 SK는 이미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국내 최고의 센터 서장훈(207㎝)-재키 존스(201㎝)-로데릭 하니발(193㎝)의 트리플타워를 활용, 애초에 열세이리라는 예상을 깨고 현대 걸리버스를 물리치며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현대 신선우 감독이 180㎝의 단신 조성원을 LG로 트레이드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트리플타워로 중무장한 SK와의 챔프전서 신장의 열세를 톡톡히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SK는 올 시즌 정규리그 초반 서장훈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트리플타워 노하우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1월16일 서장훈의 복귀와 동시에 더욱 농익은 트리플타워의 힘을 펼쳐보이게 됐다. 지난해처럼 앞으로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SK의 트리플타워는 더욱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트리플타워’의 가장 큰 장점은 농구의 최대 무기인 ‘높이의 우위’다. 신장의 우세를 바탕으로 골 밑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고 상대팀으로 하여금 매치업에 곤란을 느끼게 해 수비에서 상대적 우위를 지킬 수 있다는 점이다.

수비리바운드의 우세는 물론, SBS 데릭스의 경우처럼 용병센터들의 체력을 비축하게 하는 사이드 효과도 얻을 수 있다. SBS가 한창 트리플타워 카드를 활용했을 때 상대팀 한 선수는 “산 하나를 제치면 더 큰 산 하나가 버티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골 밑을 파고 들어도 끝이 없었다”며 빅맨 수비수들이 주는 위압감을 설명했다. 공격에서는 로포스트에서의 확률 높은 2점슛으로 좀더 용이하게 점수를 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단점으로 꼽히는 것은 장신선수들의 가장 큰 맹점인 스피드 저하다. 어느 팀이건 빅맨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스피드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LG가 바로 그런 경우다. 박도경이 투입됐을 때 속공의 위력이 눈에 띄게 저하되는 것이다. 또 세명의 장신선수가 한꺼번에 인사이드에 있을 경우 자연히 상대팀의 수비수 3명까지 따라붙게 마련이므로 좁은 골 밑에 6명의 선수가 복닥거리는 상황을 초래, 오히려 유연한 공격을 펼치는 데 마이너스될 가능성도 높다. 이 밖에 외곽슛이 좋지 않은 팀은 이 전술을 쓸 경우 역효과를 낼 공산도 크다. 반드시 민활한 포인트 가드와 믿을 만한 슈터가 버티고 있을 때만 이 전술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프로농구 코트에 트리플타워를 처음 선보인 팀은 바로 98∼99시즌의 기아 엔터프라이즈였다. 항상 포스트를 강조해온 당시 박인규 감독은 외곽은 백전노장 강동희와 김영만에게 맡기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클리프 리드-제이슨 윌리포드-김유택(또는 조동기)을 동시에 인사이드에 세웠다. 트리플타워의 개념이 생소했던 당시, 농구인들은 말도 안 되는 변칙전술을 쓴다고 비웃었지만 기아의 트리플타워는 챔피언결정전 때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였고 다음 시즌 SK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공교롭게 트리플타워를 첫 시도한 박인규 전 기아 감독이 올 시즌 직전 SBS 코치로 적을 옮기면서 삼성전을 앞두고 김인건 감독에게 트리플타워 카드를 제안, 새로운 팀에서 멋지게 성공했다.

이충희 감독의 반론

LG 세이커스. 박도경-대릴 프루(왼쪽부터).
그러나 ‘트리플타워’에 대한 우려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트리플타워라는 개념이 미국 프로농구(NBA)에도 없는 국적 불명의 전술이라는 점이다. 이충희 전 LG감독은 “트리플포스트는 공격시 메리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변칙전술”이라고 잘라 말한다.

즉 세명의 장신선수가 골 밑에 투입될 경우 수비시 약간의 우세가 있을 진 몰라도 공격할 때 스피드도 떨어질뿐더러 로포스트 포화상태를 초래해 전혀 상대팀에 위압감을 주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또 세명의 빅맨이 모두 로포스트에 있는 게 아니라 ‘로포스트-하이포스트-로포스트’에 포진해 있으므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트라이앵글 포스트’가 적절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올 시즌 프로농구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트리플타워’. 찬반양론 속에서 어쨌든 올 시즌 프로농구판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며 팬들의 흥미를 끈 트리플타워는 남은 정규리그 경기와 플레이오프에서도 나름의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범자/ 스포츠투데이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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