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동욱의 스포츠 일러스트]
센터, 파워포워드, 스몰포워드로 변신하며 코트를 다 가져온 정선민
10년간 변함없는 클래스를 유지해온 그녀의 농구인생 3막이 올랐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정선민(천안 국민은행·31)은 어쩌면 인기 있는 타입의 선수는 아니다. 당대의 라이벌들과 비교해보아도, 전주원의 농구만큼 화려하지 않고 정은순처럼 귀여운 외모도 없다. 비유컨대, ‘여자 서장훈’에 가깝다. 그는 감독을 즐겁게 할지언정 광적인 팬을 거느린 선수는 아니다. 당대 최고의 선수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선수는 아닌 것이다. 물론 당대 최고라는 말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절정의 정선민이 절정의 정은순, 절정의 전주원에 못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자농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정상의 ‘클래스’를 유지한 선수로, 단연 정선민을 꼽겠다. 그는 25살에도 완성된 선수가 아니었다. 20대 후반까지 성장하는 선수였다. 그래서 서른 살의 기량으로 따지면, 정선민은 정은순을 압도한다. 부상 없는 꾸준함을 놓고 보면 전주원을 앞선다. 93년 농구대잔치부터 2006년 프로여자농구까지, 정선민은 변함없는 클래스를 유지해왔다. 그는 93~94 농구대잔치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해서 95~96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쥐었고, 여자프로농구 2000년, 2001년 여름리그 MVP에 올랐다. 어느새 강산이 바뀌었지만 그의 클래스는 여전하다.
WNBA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마치 농구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자신은 “아니에요. 땡땡이도 잘 쳐요”라고 부정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하나의 일에 끝없이 몰입하는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은퇴할 나이에 그는 여전히 정상이고 싶어한다. 이제 멋도 부릴 만하건만 여전히 외모도 수수하다. 물론 그도 “요즘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결혼도 해야 하는데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며 웃었다. 승부욕도 강하다. 지면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기면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강산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10년 전 20대의 그를 보면서는 ‘철없이 왜 저러나’ 했는데, 10년 뒤 30대의 그를 보면서는 ‘정말 대단한 열정이구나’ 싶다. 약간은 ‘지루한’ 선수로 여겼던 정선민을 ‘재평가’하게 된 계기는 그의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도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무모한 도전이었다. 정선민은 한국 여자선수로는 전무후무하게 2003년 WNBA에서 뛰었다. ‘꼭’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한국 최고 연봉의 선수였고, 서른 줄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미국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낮았고, 돈벌이도 한국만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갔다. 그런 정선민에게서 정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어하는 장인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의 도전은 실패였다. 교체 멤버로 뛰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도대체 왜 갔을까. “용병들이 대접받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한 우물에서 놀기가 재미도 없었다”고도 했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그는 “갔다왔기 때문에 건재할 수 있다”며 “1분을 뛰었어도 1%의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본고장 농구에 부딪히면서 배우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농구의 달인이다. 원래는 득점왕이었다. 여자프로농구에서만 3번 득점왕을 했다. 장인의 기술은 날로 다양해졌다. 득점에 튄공잡기는 기본이었고, 가로채기를 더하더니 도움주기까지 통달했다. 그는 팀을 두 번 옮겼는데 그때마다 포지션이 바뀌었다. 실업팀 SK에서는 센터였고, 프로팀 신세계에서는 파워포워드였다. 용병이 들어오면서 센터에서 파워포드로 포지션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국민은행으로 옮기면서는 스몰포워드로 거듭났다. 포지션이 외곽으로 넓어지면서 시야도 넓어졌다. 말 그대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거듭났다. 기록이 증명한다. 그는 ?년 겨울리그 직전까지 개인 통산 득점 1위, 튄공잡기 2위, 가로채기 2위, 도움주기 4위였다. 농구에 관한 한 팔방미인이요, 달인의 경지다. 대략 여자농구는 정선민의 ‘원맨쇼’였다. 실제 경기 때마다 원맨쇼를 했다. 하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우승 청부사 정선민의 자존심에 위기가 닥쳤다. 가는 팀마다 우승팀으로 만들었지만, 2003년 이적한 국민은행에서는 우승에 실패했다. 팀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드디어 정선민의 개인 플레이가 팀 플레이를 망친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제는 한물갔다는 평가가 떠돌았다. 그는 “능력의 한계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며 “지난해 정말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했다”고 돌이켰다. ‘정선민 때문에 이긴다’에서 ‘정선민 때문에 진다’로 바뀌었다. 시절은 바뀌었다.
농익은 아름다움이여
그렇게 사라질 정선민이 아니었다. 1라운드가 끝난 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 그의 팀은 5연승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정말 모처럼 그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정선민의 플레이도 달라졌다. 올 시즌 들어 득점은 조금 줄었지만, 기여도는 더욱 늘어났다. 포워드로는 ‘불가능한’ 도움주기 2위를 달리고 있다. 그는 ‘포인트 포워드’라는 농구 계보에 없는 포지션도 만들고 있다. 그는 “이제 패스를 하는 순간 패스를 받은 선수의 슛이 들어갈지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남이 던지는 슛의 운명도 감지하는, 정녕 달인의 경지다. 그는 “마음을 비우고 정성이 들어가니 승리가 따라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포지션이 제한된 플레이는 재미없다”고 했다. “돌아다니면서 패스를 가로채고, 선수들에게 도움주고, 찬스 나면 슛 던지고” 하는 플레이가 좋단다. 혹시 채널을 돌리다가 국민은행 경기를 만나면 잠시 채널을 멈추어보시라. 설렁설렁 돌아다니다가 한순간의 움직임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경지를 만날 수 있다. 10년을 갈고닦은 농익은 아름다움이다. 정선민 선수는 SK의 센터에서 신세계의 파워포워드로, 국민은행의 스몰포워드로 변신해왔다. 이제 막 정선민 농구 인생의 제3막이 올랐다.
10년간 변함없는 클래스를 유지해온 그녀의 농구인생 3막이 올랐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정선민(천안 국민은행·31)은 어쩌면 인기 있는 타입의 선수는 아니다. 당대의 라이벌들과 비교해보아도, 전주원의 농구만큼 화려하지 않고 정은순처럼 귀여운 외모도 없다. 비유컨대, ‘여자 서장훈’에 가깝다. 그는 감독을 즐겁게 할지언정 광적인 팬을 거느린 선수는 아니다. 당대 최고의 선수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선수는 아닌 것이다. 물론 당대 최고라는 말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절정의 정선민이 절정의 정은순, 절정의 전주원에 못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자농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정상의 ‘클래스’를 유지한 선수로, 단연 정선민을 꼽겠다. 그는 25살에도 완성된 선수가 아니었다. 20대 후반까지 성장하는 선수였다. 그래서 서른 살의 기량으로 따지면, 정선민은 정은순을 압도한다. 부상 없는 꾸준함을 놓고 보면 전주원을 앞선다. 93년 농구대잔치부터 2006년 프로여자농구까지, 정선민은 변함없는 클래스를 유지해왔다. 그는 93~94 농구대잔치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해서 95~96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쥐었고, 여자프로농구 2000년, 2001년 여름리그 MVP에 올랐다. 어느새 강산이 바뀌었지만 그의 클래스는 여전하다.

농구의 달인은 결정적 순간에는 치열한 볼다툼도 마다하지 않는다. 2006 겨울리그 신세계전에서 튄공잡기를 하는 정선민(가운데). (사진/ 연합)

정선민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경기를 '내인생의 경기'로 꼽았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미국과의 준결승 경기. (사진/ AFP 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