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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야만의 땅에서 킹콩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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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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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성해도 놀라웠던 33년작 <킹콩>의 판타지를 부활시킨 피터잭슨
킹콩과 앤의 “뷰티풀"한 교감은 동물-인간 관계 이상의 것

▣ 김봉석/ 영화평론가

초등학교 때, 지금은 사라진 광화문 네거리의 국제극장에서 <킹콩>을 봤다. 간판에 그려진, 무역센터 빌딩 위에서 전투기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던 킹콩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되짚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킹콩에게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로봇 태권 V>나 <스타워즈>가 더욱 인기였다. 하지만 킹콩의 이미지가 그토록 선명한 것은,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킹콩> 속의 영화감독 덴햄은, 단지 새로운 영상을 찍기 위해서 해골섬에 간다. 아직까지 인간이 보지 못했던 원시의 풍경을 찍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우선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하기 이전에, 눈을 감기 전까지 영화는 모든 것을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 원초적인 이미지의 힘은, 영화의 마력이다. ‘괴수’라는 존재는, 그런 점에서 영화란 매체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괴수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의 쾌락


피터 잭슨의 <킹콩>은 킹콩의 로맨스로 다른 감독들의 <킹콩>과 차별화된다.

극장에서 1976년판 <킹콩>을 본 뒤에야, 33년작인 오리지널 <킹콩>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흑백이고 인형으로 만든 것이 분명함에도 오리지널 <킹콩>은 모든 점에서 한 수 위였다. 킹콩이 공룡과 싸우다가 입을 찢어버리는 장면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이 킹콩이 진짜라는 것을. 76년에 리메이크된 <킹콩>은 사실성을 강조했다. 킹콩은 현실에 있을 법한 커다란 뱀하고 싸워야 했고, 킹콩을 뉴욕으로 데리고 오는 이동 수단은 반드시 거대한 유조선이어야 했다. 이만큼 사실적인 조건 속에서 싸우는 킹콩은 더욱 위압적이고 생생해야 했다. 하지만 33년작 킹콩이 훨씬 더 야성적이고, 진짜 괴수 같았다. <킹콩>의 의미를 굳이 말할 수는 있다. 미지의 해골섬에서 발견한 거대한 고릴라는, 근대 이후 서구인들이 항해에 나서면서 발견한 야만의 신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백인 미녀에게 반해 사랑에 빠지고 죽어가는 킹콩의 모습은, 서구 문학의 오래된 주제인 ‘미녀와 야수’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특수효과 전문가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스톱모션 촬영으로 만들어진 킹콩이 선사하는 스펙터클도 놀라웠다. 하지만 9살 때 오리지널 <킹콩>을 처음 본 피터 잭슨이 반한 것은, 무엇보다 판타지였다. 괴수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과 도피의 쾌락. 피터 잭슨은 그 놀라운 판타지의 쾌락을 재현하기 위해, 그토록 <킹콩>의 리메이크를 갈구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보고 싶은 영상으로 <킹콩>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

피터 잭슨은 <킹콩>을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킹콩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를 본 세상은 이미 판타지의 모든 상상력을 수긍할 만큼 길들여져 있다. 공룡들이 왜 굳이 좁은 벼랑 사이를 뛰어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람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밟혀 죽지 않는지, 그런 논리적 사실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피터 잭슨은 합당한 이유를 찾고 사실적인 영상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정서적 공감과 스펙터클의 환희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어차피 필름에 투사된 판타지인 것이다.

피터 잭슨이 심혈을 기울인 것 하나는 역시 킹콩과 앤의 관계다. 원작에서 킹콩은 여배우를 짝사랑한다. 그녀 역시 킹콩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일종의 동정이었다. 가련한 원주민에게 보이는 서구인의 연민과 눈물처럼. 하지만 피터 잭슨의 킹콩은 그저 앤의 미모에 혹하는 것이 아니다. 킹콩에게 잡혀간 앤은, 자신의 장기인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다. 쇼걸이 아니라 코미디 배우를 원했던 앤 대로우는, 처음으로 킹콩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킹콩은 앤의 코미디와 그것을 보여주는 용기에 반하고, 앤은 자신의 연기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킹콩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킹콩과 앤은 단 한마디 ‘뷰티풀’이란 단어만을 공유하지만, 어떤 연인 못지않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킹콩이 단지 야만의 땅에서 온 괴수가 아니고, 앤과 킹콩의 관계가 단지 동물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피터 잭슨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화감독 덴햄은 잭슨 자신이었나

킹콩을 찾아내고, 킹콩을 뉴욕으로 잡아오는 영화감독 덴햄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덴햄은 영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인간이다. 무단으로 필름을 훔치고, 동료의 죽음을 영화를 위한 순교로 추앙하고, 위급한 순간에 앞에 나서 킹콩을 사로잡는 용기도 보여준다. 너무나도 이기적이지만, 덴햄을 미워하기는 쉽지 않다. 덴햄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자신이 믿는 길로 오직 돌진할 뿐이다. 그는 킹콩을 필름에 담을 수 없었기에, 실물을 원한 것뿐이다. 필름에 담지 않았다 해도, 덴햄은 자신이 킹콩의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영화와 실재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덴햄의 모습은 가상의 세계를 완벽한 영화 속 현실로 보여주는 피터 잭슨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피터 잭슨은, 모든 관객을 위한 <킹콩>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한 판타지를 만들었고, 도피적인 쾌락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거기에 굳이 의미를 다는 것은 각자의 권리이지만, 피터 잭슨이 원한 것은 킹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린 날의 피터 잭슨에게 충격을 주었던 킹콩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재현하기만 한다면, 이후는 책임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덴햄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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