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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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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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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섹스]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뇌도 어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2004년 겨울 어느 추운 날, 20대 초반의 남녀가 과자를 서로 입에 넣어주며 낄낄대며 걸어오는 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맛있냐?”고 말하고 꼬나보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황당해하던 표정이란. 가까이 맨홀이라도 있다면 뚜껑 열고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꽁꽁 얼어붙은 2005년 12월의 어느 날 비슷한 짓을 또 저질렀다. 회사 앞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였다. 늘씬한 연노랑 스포츠카 한 대가 신호대기에 걸려 내 앞에 있었다(만리동 고개에서는 보기 드문 차종이다). 뚜껑 없는 그 차에는 남녀 한 쌍이 누가 우리 좀 안 봐주나 두리번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만 “니들 안 춥냐?”고 물었다. 곧 신호가 바뀌고 그들은 별 정신 나간 아줌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횡하니 가버렸다. 정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뇌가 얼어 판단이 흐려진 게 틀림없다. 아니다. 내(뇌) 잘못이 아니다. 사실…, 개인 사정으로 너무 굶어서 그런 거 같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해 바뀔 즈음이면 세상이 온통 나만 빼고 연대투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쌍쌍이 짝지어 다니는 것들이 넘쳐난다. 심지어 별별 송년회조차 몽땅 12월 초다. 쌍쌍족 아니면 가족을 위한 타임 스케줄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소개했던, 요즘 원룸용 식탁을 노려보며 지내는 ㄱ은 한동안 뜨개질에 열중하다 최근 피아노를 배우러 다닌다. 정신 건강에 좋은 선택이다. 한데 피아노 학원조차 연말연시에는 쉰단다. 크리스마스라도 지나고 헤어질걸 하는 생각은 꿈에라도 하지 말라며, 시련의 흔적을 박박 지우는 것이야말로 알차게 새해를 맞는 자세라고 열변을 토하자, ㄱ의 표정은 연민이 가득 담긴 “너나 잘해”다.

보통 성 행동의 변화는 정확하고 폭넓은 지식과 정보, 동기부여, 구체적인 행동 스킬(의사소통 방식, 성적 테크닉 등)이 함께 이뤄질 때 빠른 변화를 보인다(대한성학회 3차 학술대회 ‘성 상담 기법’). 또 성 상담에서는 모두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담자의 경험이 무엇이건 허락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자위를 하나요?’라고 묻지 말고 ‘처음 자위를 한 때가 몇 살이었나요?’라고 묻는 식이다(위의 발표). 그런데 말이다. 가까운 사이에서 성 상담을 포함한 연애 상담을 하게 되면 난감하다. ‘처음 거절당한 때가 언제였니?’라거나 ‘지금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물을 수는 없다. 괜한 상처를 들추는 짓일 수 있는데다, 같이 자주기도 그런 상대를 조달해주기도 난망하니까. 상담의 기본인 ‘공감’과 ‘수용’을 정직하게 내보이는 게 상책이다. ‘너만 옆구리 시린 게 아니거든’ 모드.

악몽의 크리스마스에 이어 지옥의 연말연시를 보내는 애들이랑 알차게 섹스숍에나 둘러봐야겠다. 속없는 (그러면서도 짝은 있는) 친구야, 제발 위로한답시고 공연 초대권이나 야한 속옷 말고, 신형 바이브레이터 아니면 바람 넣었다 뺐다 하는 풍선 팔 베개(일명 ‘오빠의 팔베개’)나 보내다오. 정말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단다. 새해에는 환난상휼 그만하고 예속상교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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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