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부인>
성적 해방감과 자유를 드러낸 목가적 공간… 어둠이 깔렸던 탐욕의 방은 추억 속으로
“당신이 미성년자일 때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이제 그 속편이 나왔습니다. 속 영자의 전성시대!”
지금은 개그맨인 전유성씨가 영화사에 근무하던 시절 남긴 카피 그대로 70년대 빡빡머리 사춘기 소년들에게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는 단연 <영자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80년대, 교복자율화와 함께 찾아온 82년 첫 번째 흥행작 <애마부인>은 80년대 사춘기 남학생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영화였다. 주인공 애마 역을 맡은 배우는 곧 그 시절의 섹스심벌이었고, 가장 화끈한 여배우라는 인증이었다.
80년대는 이른바 에로영화의 시대였다. 신군부 독재정권의 3S(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이 그 배경이었다. 물론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워낙이나 에로틱한 영화가 없었던 한국영화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이 에로영화들은 영화팬들의 관음욕을 채워주는 새로운 볼거리였고, 그 대표적인 아이콘이 <애마부인>이었다.
너무나 소박한 80년대 에로영화의 대명사 사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애마부인>의 ‘야함’은 너무나 소박하다. 아무리 18년 전이라고 해도 별로 야하지도 않은데 왜 그리 인기를 끌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정사장면에서 몸 전체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알몸도 아니다. 요즘엔 너무 흔해진 가슴노출도 불과 몇초도 안 된다. 섹스의 묘사는 끌어당겨 키운 얼굴 화면과 신음소리, 오버랩으로 겹치는 영상을 통한 은유적 빗대기에 머문다. 주인공 애마가 알몸으로 말을 타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도 주인공의 몸은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18년이란 세월 동안 사회적 가치기준이 얼마나 빨리 변했는가를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세월만큼 바뀐 감각이 하방경직성으로 길들여져 더 강하고 더 야한 자극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8년 전 애마부인이 보여줬던 영상은 당시 80년대 초반의 한국인들이 원하던 성적 환상의 눈높이라는 점이다. <애마부인>이란 영화에 등장하는, 그 영화가 그리고 싶었던 영화 속 풍경은 80년대의 것이다. 그래서 애마가 환상 속에서, 또는 실제로 정사를 벌이는 무대는 바로 80년대 성인들이 가장 섹스하고 싶어하는 장소들이 아니었을까. “80년대는 산업화에서 벌어지는 부부의 문제, 성의 문제가 사회현상으로 드러나던 시대라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서울 강남의 영동이라는 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밤이면 여관의 붉은 네온사인과 또 교회의 붉은 십자가가 번쩍거리는 그 도시의 모습이 70년대와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남자들은 돈번다는 핑계로 밖에서 바람피우고, 부인들은 그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참고 살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때부터 ‘네가 그러면 나도 그런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실제 그런 일들이 신문 사회면에 나오기도 했고. 산업사회의 체제가 완전해지면서 바뀌는 그런 성의식을 한번 영화로 하자고 한 게 <애마부인>이에요.” 80년대 여성들이 상상하던 반란, 그것을 영화는 담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주인공 애마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결국 결혼이란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남편에게 되돌아간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주인공 코니는 남편을 떠나지만, 애마는 남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일을 핑계로 집에 못 들어간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화장을 지우며 홀로 잠을 청한다. 남편이 과실치사로 감옥에 간 사이, 애마가 꿈꾸는 성적 일탈과 해방의 환상은 그저 상상 속의 것일 뿐이라는 점은 80년대적 시대정서 그대로인 것이다. 지금에는 옛것으로 비치는 것들도 그때는 새로움이었다. 60년대의 <자유부인>과 70년대의 <영자의 전성시대>가 섹스를 리얼리티로 다루는 것은 그 시기의 정서였고, <애마부인>의 섹스가 몽환적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은 또다시 바뀐 시대적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극장에 줄을 섰고, 집안에 있던 주부들도 영화관으로 몰려들면서 <애마부인>은 그해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됐다. 영화관이 단관이던 시절 서울극장에서 반년 동안 상영되면서 31만명을 동원했다. 오죽했으면 서울극장 곽정환 사장이 정 감독에게 감사패까지 줬을까. 애마가 상상하는 성적 해방감과 자유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목장에서 알몸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으로 집약된다. 이 상상의 장면은 80년대 성인들이 꿈꾸는 성적 공상의 공통된 이미지였을 수도 있다. 너른 들판, 그리고 알몸의 자연상태 그대로 달리는 모습, 거기에 덧씌워진 성적 암시. 모두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직설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그리고 드러내기보다는 살짝 유추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것들이다. 밀실에 갇혔던 애마, 은밀한 드러내기
영화의 제목처럼 <애마부인>의 간판 이미지가 된 이 장면은 경기도 수원 부근의 한 말목장에서 찍었다. 대낮에 알몸으로 안장도 없이 말을 타라는 주문에 안소영씨는 울면서 거부했고, 정 감독은 달래느라 애먹은 장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빠듯한 예산 때문에 원래 생각했던 제주도 대신 고른 장소였다는 점, 그리고 정 감독 스스로 “검열에 익숙해져 ‘심의라는 개목걸이를 찬 기분’으로 적나라하게 찍지 못한 점”은 지금도 그가 아쉬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애마부인>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정사장면들은 상상 속이건 줄거리상 실제의 일이건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벌어진다. 애마가 남편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연인들의 애무에 자극받아 자위행위를 하고 처음 만난 사람과 정사를 벌이는 상상을 하는 간이역 카페는 그런 80년대식 성적 환상을 반영한다. 실제 어둡고 칸막이가 시야를 가려주는 밀실구조의 카페들은 80년대 연인들이 사랑을 불태우는 곳으로 선호한 곳이었다. 80년대 사람들에게 그런 곳은 그대로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었고, 실제 성적 공간으로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아파트란 당시 막 붐이 일던 새로운 주거 공간도 이 영화에선 새로운 성의 공간으로 비친다. 시댁의 억압을 피해, 그리고 자유를 찾아 아파트로 이사오는 것 자체가 주인공이 육체적 자기반란을 시도한다는 복선이었다. 남편이란 과거의 섹스상대와 살던 단독주택, 그리고 새로운 섹스의 공간인 아파트는 섹스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공간장치들이었다. 정 감독은 피사체인 안소영씨의 매력포인트로 굴곡진 몸의 옆선을 골라냈다. 잠든 애마의 구릉처럼 물결치는 에스자 몸선을 훑어가는 문오의 탐욕스런 눈빛은 아파트라는 공간의 세련미를 강조하는 영상적 탐미로 비친다.
애마가 진실로 사랑했던 연하의 청년 동엽과 처음이자 마지막 섹스를 하게 되는 시골의 허름한 헛간은 되레 역설적인 곳이다. 헛간의 틈으로 번갯빛이 들어와 뒤엉킨 연인들의 몸을 비추고, 달뜬 분위기는 어둠 속에서 살짝살짝 시각을 자극한다. 토속적인 정사신을 이으며 뒤이어 쏟아지는 에로물마다 등장하는 이 한적한 시골의, 비가 쏟아지는 여름밤의 한바탕 열정의 장면은 그래서 아파트에서의 정사와는 반대의 느낌으로 시각을 파고든다. 원치 않은 옛 애인과의 정사는 세련미로, 진정 원하던 정인과의 정사는 토속적으로 배치한 이 이미지들은 당시 영화에선 없었던 성적인 패션이었고, 성적 표현에 갈증나던 그 시절 성인들에겐 시각적 자극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소영이란 새로운 스타일의 히로인만큼 <애마부인>을 새롭게 해준 것은 없었다. 서구형 몸매에 풍만한 가슴, 백치미와 끼가 넘치는 표정은 기존 한국영화의 주연 여배우와는 다른 캐릭터였다.
주인공 애마 역에 당시 스물세살 완전 무명인 연극배우 안소영씨가 캐스팅된 것은 사실 예정에 없던 선택이었다. 감독 정인엽씨는 처음 성에 관한 영화인 만큼 성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기혼 여배우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이제는 시어머니 역할로 더 많이 나오는 중진 탤런트 ㅈ씨와 ㄱ씨에게 섭외를 했는데 둘 다 상반신만 벗겠다고 고집해서 과감하게 신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안씨가 이제 스물세살인 쌩쌩한 아가씨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디자이너 루비나씨에게 데려가 속옷만 빼고는 옷차림을 서른두살 유부녀로 싹 바꿔달라고 했어요. 또 안소영씨의 프로근성도 한몫을 했죠. 몇번이고 거듭되는 촬영에도 야무지게 해내는데 정말 서른두살처럼 연기를 하더라구요. 나중에 영화가 성공하고 나서 엉엉 울 때는 영락없는 신인이었지만.”
원래 <애마부인>은 소설이었다. 탤런트 김혜리씨의 어머니인 소설가 조수비씨의 작품을 정씨가 영화화하면서 붙인 제목이 <애마부인>이었다.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유명한 에로영화 <엠마뉴엘 부인>을 패러디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말을 타는 여자를 한자로 써서 만든 것일 뿐이었고 그래서 한자로 ‘愛馬’라고 표기해 심의에 올렸는데 이유없이 바꾸라고 해 ‘愛麻’로 바뀌었다고 한다. 영화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이름이 된 것이다. 정 감독은 또한 원작자 조수비씨의 이름이 무척 매력적이어서 주인공 이름을 무조건 ‘수비’로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씨는 ‘소영’을 원하는 바람에, 이 이름은 결국 2편의 주인공인 오수비씨에게 붙여졌다.
애마의 농장은 쇠락했고 정사는 대담해져
그러나 항구성을 담기보단 시대상황을 담는 영화의 운명은 강렬해도 짧은 삶으로 마감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이미지도, 공간도 이제는 함께 사라졌다. 연인들이 살을 부비던 어두운 카페도 사라졌고, 아파트는 오히려 낡은 공간으로 치부될 뿐이다. 애마가 말을 달리던 작은 농장은 쇠락했고, 영화 속 정사는 훨씬 감각적이고 밝은 색조 속에서 대담하고 ‘뻔뻔’해졌다. 파격의 스토리만으론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95년, 열한 번째 속편으로 상영됐다가 마지막 <애마부인> 시리즈로 막을 내린 <애마부인11>은 1만명도 안 되는 9천여명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고 마침내 ‘애마’라는 단어를 은막 뒤로 떠나보냈다.
정 감독 자신도 2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영화를 찍는다면 전혀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더 개방적이고 노출된 장소에서의 일탈을 꿈꾸겠죠. 다시 찍으면 아마 <나인 하프 위크>처럼 개방된 거리의 한 구석에서 정사를 나누는 등으로 성적 판타지를 표현했을 거예요. 분위기보다는 순간적 강렬한 자극으로 사로잡는 섹스 이미지가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장면일 테니까.”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성적 해방감과 자유를 드러낸 목가적 공간… 어둠이 깔렸던 탐욕의 방은 추억 속으로

너무나 소박한 80년대 에로영화의 대명사 사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애마부인>의 ‘야함’은 너무나 소박하다. 아무리 18년 전이라고 해도 별로 야하지도 않은데 왜 그리 인기를 끌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정사장면에서 몸 전체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알몸도 아니다. 요즘엔 너무 흔해진 가슴노출도 불과 몇초도 안 된다. 섹스의 묘사는 끌어당겨 키운 얼굴 화면과 신음소리, 오버랩으로 겹치는 영상을 통한 은유적 빗대기에 머문다. 주인공 애마가 알몸으로 말을 타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도 주인공의 몸은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18년이란 세월 동안 사회적 가치기준이 얼마나 빨리 변했는가를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세월만큼 바뀐 감각이 하방경직성으로 길들여져 더 강하고 더 야한 자극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8년 전 애마부인이 보여줬던 영상은 당시 80년대 초반의 한국인들이 원하던 성적 환상의 눈높이라는 점이다. <애마부인>이란 영화에 등장하는, 그 영화가 그리고 싶었던 영화 속 풍경은 80년대의 것이다. 그래서 애마가 환상 속에서, 또는 실제로 정사를 벌이는 무대는 바로 80년대 성인들이 가장 섹스하고 싶어하는 장소들이 아니었을까. “80년대는 산업화에서 벌어지는 부부의 문제, 성의 문제가 사회현상으로 드러나던 시대라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서울 강남의 영동이라는 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밤이면 여관의 붉은 네온사인과 또 교회의 붉은 십자가가 번쩍거리는 그 도시의 모습이 70년대와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남자들은 돈번다는 핑계로 밖에서 바람피우고, 부인들은 그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참고 살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때부터 ‘네가 그러면 나도 그런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실제 그런 일들이 신문 사회면에 나오기도 했고. 산업사회의 체제가 완전해지면서 바뀌는 그런 성의식을 한번 영화로 하자고 한 게 <애마부인>이에요.” 80년대 여성들이 상상하던 반란, 그것을 영화는 담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주인공 애마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결국 결혼이란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남편에게 되돌아간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주인공 코니는 남편을 떠나지만, 애마는 남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일을 핑계로 집에 못 들어간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화장을 지우며 홀로 잠을 청한다. 남편이 과실치사로 감옥에 간 사이, 애마가 꿈꾸는 성적 일탈과 해방의 환상은 그저 상상 속의 것일 뿐이라는 점은 80년대적 시대정서 그대로인 것이다. 지금에는 옛것으로 비치는 것들도 그때는 새로움이었다. 60년대의 <자유부인>과 70년대의 <영자의 전성시대>가 섹스를 리얼리티로 다루는 것은 그 시기의 정서였고, <애마부인>의 섹스가 몽환적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은 또다시 바뀐 시대적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극장에 줄을 섰고, 집안에 있던 주부들도 영화관으로 몰려들면서 <애마부인>은 그해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됐다. 영화관이 단관이던 시절 서울극장에서 반년 동안 상영되면서 31만명을 동원했다. 오죽했으면 서울극장 곽정환 사장이 정 감독에게 감사패까지 줬을까. 애마가 상상하는 성적 해방감과 자유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목장에서 알몸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으로 집약된다. 이 상상의 장면은 80년대 성인들이 꿈꾸는 성적 공상의 공통된 이미지였을 수도 있다. 너른 들판, 그리고 알몸의 자연상태 그대로 달리는 모습, 거기에 덧씌워진 성적 암시. 모두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직설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그리고 드러내기보다는 살짝 유추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것들이다. 밀실에 갇혔던 애마, 은밀한 드러내기

(사진/<애마부인>)

(사진/개발과 함께 도시의 밤거리를 뒤덮기 시작한 유흥가의 모습이야말로 80년대 초반 한국사회의 욕망을 반영한다. 정인엽 감독은 그런 욕망의 이미지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