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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장미란의 장밋빛 낙관주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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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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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동욱의 스포츠 일러스트]

일년 만에 세계역도선수권대회 금메달 딴 유쾌한 아테네 은메달리스트
경쟁지상주의와 외모 콤플렉스 깨는 예쁜 모습, 끝까지 보여주실 거죠?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올 것이 왔군.’


지난 11월15일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서 장미란(22·원주시청)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떠오른 생각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아쉬운 은메달을 따고도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았던 ‘피오나 공주’의 그 도저한 낙천주의라면, 언젠가 세계 정상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올 것이 왔으되 조금 빨리 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장미란의 성장세가 욱일승천의 기세일지라도 중국의 벽을 이렇게 가뿐히, 그토록 빨리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 여자역도는 한 선수 넘어 두 선수가 버티고 선 겹겹의 만리장성 아니던가. 중국 여자역도는 한국 여자양궁처럼 국내 선발전이 세계대회보다 경쟁이 치열할 만큼 벽이 높다. 장미란이 그런 중국 선수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 나는 장미란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는데, 장미란이 운동을 잘할 뿐 아니라 유쾌하기 때문이다. 장미란은 ‘내겐 너무나 멋진 그녀’다.

쿨하고 쇼킹했던 “은메달이 기뻐요”

나만의 아테네올림픽 최우수선수(MVP)를 뽑는다면, 단체종목은 당연히 여자핸드볼 팀이고, 개인종목은 단연 장미란 선수다. 여자핸드볼 선수들이 불굴의 투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면, 장미란 선수는 마침내 한국 스포츠에 ‘쿨’한 신세대가 당도했음을 알려주었다. 한국은 이상한 나라고, 선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무려’ 올림픽에서 ‘그 좋은’ 은메달을 따고도, 웃는 선수가 드물었다. 그래도 요즘엔 나아졌지만,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노메달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금메달지상주의가 고래의 악습으로 전해져왔다.

올림픽 은메달에서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까지, 장미란이 정상에서 웃는 데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진/ AFP연합)

장미란은 금메달보다 멋진 은메달로, 금메달 지상주의를 반성하게 했다. 알다시피, 아테네올림픽 역도경기장에서 장미란의 금메달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중국 선수가 막판에 모험을 했고, 판정이 모호했고, 역전을 당했다. 스스로 ‘비국민’을 자처하는 자가 보기에도, 판정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흥분할 때, 장미란은 기뻐했다. 유구한 전통에 따라 금메달을 빼앗긴 ‘한’을 토해내야 할 선수가, “아쉽지 않다. 은메달을 따서 너무 기쁘다”고 ‘쿨’하게 말하자, 세상은 정말 ‘썰렁’해졌고, 나는 정말 ‘쇼킹’했다. 한술 더 떠서 “중국 선수가 금메달을 딸 자격이 있다”고 칭찬하고, “목표를 너무 빨리 이루면 재미없는 것 아니냐”는 철학까지 선보였다. 장미란의 아름다운 미소는, 경쟁지상주의 과거에 보내는 멋진 작별인사였다. 2004년, 당시 처녀의 나이 방년 ‘스물하나’였다. 그리고 일년밖에 지나지 않아 세계 정상의 목표를 이루었다.

장미란의 ‘깨는’ 행보는 올림픽 이후에도 계속됐다. 대한역도연맹 회장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장미란의 소원은 권상우 오빠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깜찍한 외모에 어울리는 깜찍한 소원이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소원이 체면을 의식한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고,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소한 그 무엇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아니 좋아지고 있었다. 한국은 그의 장난기 섞인 솔직함에 매료됐다. 네티즌들이 응원했고, 오빠가 화답했다.

(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04년 8월 말, 꿈은 이루어졌다. 마침내 장미란 선수가 권상우 오빠를 만났다. 권상우 오빠는 ‘천국의 계단’ 목걸이를 선물했다. 장미란은 심심찮게 그 목걸이를 걸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장미란은 외모에도 솔직하다. 그는 외모에 무심한 척하지 않고, 외모에 신경쓰인다고 말한다. 다리가 두꺼워서 치마 정장인 올림픽 선수단복을 입는 것이 싫다고 털어놓고, 선수로 모든 것을 이룬 다음 몸무게를 왕창 빼서 멋진 연애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한다(장미란의 현재 키와 몸무게는 170cm에 115kg으로 최중량급 역도선수치고는 매우 가벼운 몸매다. 이번에도 중국 선수와 합계 기록이 같았지만 몸무게가 적어 금메달을 땄다).

그렇다고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 있지는 않다. 정말 자신의 몸매를 부끄러워했다면 말하지 않았을 이야기도 서슴없이 말한다. 그는 올림픽 당시 인터뷰에서 “밥을 두 공기 먹는다”거나 “회는 혼자서 대(大)자로 1판 반을 먹어치운다”고 말했다.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라면 털어놓을 이야기가 아니다. 요컨대 그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고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는 외모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서 외모에 대한 편견을 극복한다. 그의 솔직함은 그의 아름다운 미소를 더욱 빛나게 한다. 장미란은 정말 예쁘다.

그를 따라 나도 웃고 싶다

그래서 장미란이 중산층 가정 출신이라고 짐작했다. 승부에 목숨 걸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가정 형편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알고 보니, 오해였다. 형편이 어려워서 공고에 진학했고, 성공하기 위해서 역도를 시작했다. 장미란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역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미란에게는 ‘이왕 하는 것 즐기면서 하자’는 장밋빛 낙관주의가 보인다. 그의 시작은 아버지의 강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현재는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16살에 역도를 시작해서, 19살에 국가대표 상비군이 되고, 21살에 올림픽 은메달을 따고, 22살에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했다. 아직도 창창한 나이에 가야 할 장밋빛 미래가 멀다. 다행히 그는 선수로 장수할 태도를 지녔다. 장미란 선수는 “다른 선수에게 신경쓰지 않고, 준비해온 대로 주어진 중량에 도전할 뿐”이라고 말한다. 다른 선수 같으면 ‘겉멋’이나 ‘수사’로 들렸겠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면 ‘정말’로 들린다. 그에게는 경쟁자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경쟁자를 존중하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끝까지 1등이 아니어도, 끝까지 웃음짓는 장미란을 오랫동안 보고 싶다. 그를 따라 나도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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