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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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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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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섹스]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지난번 칼럼이 나간 뒤 내 파트너의 ‘상태’가 아주 좋아졌다. 공들여 키스하고 애무도 조심스레 한다. 역시 대화로도 안 되면 폭로하는 수밖에.

최근 주변에 몇 건의 폭로전이 있었다. 이름하여 ‘까이는’ 데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별건 아니다. 호출이 오면 밥숟가락 던지고 달려가 “걔 집에 들어갈 때 뒤통수 조심하라구래~” 수준으로 같이 꽥꽥대는 정도. 어떤 일이냐고? 일방적으로 버려지는 사건들이었다. 형식은 “너를 좋아하지만 우린 여기까지인가봐” “너를 평생 사랑할 자신이 없어” 등이었으나 내용을 보자면 “너 싫다”다. 혹은 “(이런저런 불편을 무릅쓸 만큼) 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역시 취재원이든 애인이든 ‘헌신’하면 쉽게 ‘까인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나도 ‘까였다’. 순진하게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그도 괴로울 거야” 끙끙댔지만, 간단히 말해 그는 그럼에도, 매달리거나 계속 만날 만큼 “나에게 반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부모의 반대든 무슨 형편이든 인격·취향·인종·세계관의 차이든. 몇 달간은 그가 즐겨 입던 셔츠와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비슷한 키의 남자가 멀리 지나가기만 해도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가서 확인했다. 셔츠 색감과 덩치의 양감이 흐려져도, 체취는 남았다. 비 오는 날 장미 넝쿨 옆을 지날 때 그의 냄새가 났다(말버러 레드 피우는 자랑 사귀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누군가 그의 스킨향을 풍기면 코를 킁킁대며 두리번거렸다. 체취의 기억은 섹스의 기억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의 기억도 결국에는 사라진다.

두고두고 남는 것은? 선물 리스트다. “내가 사준 그 등산화 얼마짜리였지? 근데 그가 준 티파니 볼펜은? 게다가 그건 쓰던 거였는데. 그때 그 시계는 사준다고 할 때 왜 냉큼 받지 않았던 거지? 미쳤지. 크리스마스 때 비싼 와인은 왜 사다 먹인 거야? 으허헝.”

역시 인간은 섹슈얼한… 경제적 동물이다. 특히 비싼 선물을 할부로 그은 직후 헤어졌다면, 이별은 더욱 쓰리다. 3개월, 아님 6개월 결제 청구서가 날아오는 날이면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명품 가방이며 MP3며 줄줄이 선물했는데 달랑 원룸용 식탁 하나 남아 있는 대차대조표를 들고 부들부들 떠는 ㄱ양아, 네 심정 이해한다. 밥 먹거나 책 읽거나 혹은 ‘그걸’ 할 수 있는 다목적 식탁이라지만, 그걸 제대로 한 것도 아니니 더욱 억울하겠지. 그 숏다리가 너를 식탁에 눕힐 수나 있었겠니? 그와 함께 커플로 만났던, 오징어 다리조차 남친이 뜯어줘야 먹던(뜯을 힘 없는데 씹을 힘은 있니?), 그 ‘여우 같은 계집애’는 다른 더 멋진 남친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다 제3의 인물과 결혼했다던데, 일부 종사한 죄밖에 없는 난 왜 이러냐고?

다 운명의 여신이 널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조만간 식탁 다리도 와그작 와그작 씹어먹을 수 있을 만큼 강건한 몸과 마음의 소유자가 될 거다. 와신상담하며 탄트라 수련법이라도 익히길. ‘난년’ 이모를 둔 내 친구가 목하 수련 중인 건데 가만히 누워 움직이지 않고 온몸의 기운을 모아 스스로 깨달음, 아니 오르가슴에 이르는 길이래. 음… 눈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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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