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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의 컨템포러리 댄스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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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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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학에 밀착된 ‘알’의 몸짓 보여주는 축제의 춤판, 민족춤 제전
서유럽 최신 춤을 컨템포러리 댄스라고 선전하는 한국 무용계의 현실을 넘어

▣ 최해리/ 무용평론가·월간 <몸> 편집장

얼마 전 뉴욕에서 현대무용단을 운영하며 예술행정가로 활동하는 앤디 챙에게서 한국춤의 해외무대 진출에 대해 진지한 조언을 들었다. 그의 말을 옮겨본다면, “한국춤이 컨템포러리하게 포장되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전통춤을 추되 발가벗고 추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일종의 조롱이 담긴 그의 말에 무척 불쾌했지만, 전후 상황을 듣고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서글픔을 느꼈다. 문제의 발단은 문화관광부와 뉴욕의 한국문화원이 내년 초에 뉴욕의 예술마켓에서 한국의 컨템포러리 댄스 쇼케이스를 할 요량으로 무용단을 선발하기 위해 앤디 챙을 포함한 현지 예술행정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해 서류와 비디오 심사를 하게 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행사를 담당하는 일부 공관원과 한국 출신의 무용가들은 컨템포러리 댄스에 대한 인식과 기준을 서구의 컨템포러리 댄스에 맞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즉, 그들은 컨템포러리 댄스를 모던 댄스에서 진화한 미국적 포스트모던 댄스 혹은 서유럽적 컨템포러리 댄스와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 챙은 “탈식민주의 담론이 왕성한 즈음에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이런 사대주의적 발상을 하다니, 오히려 미국인인 자신이 당혹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개량한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로 어쩌면 가장 창의적인 컨템포러리 댄스일 수 있는 자신들의 현대적인 한국춤을 전통춤 계열로 치부해버리는 발상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전해왔다. 그러면서 문제의 조언을 내게 주었던 것이다.


“한국의 사대주의 당혹스럽다"

이사도라 덩컨이 춤의 해방과 자유를 주장하며 맨발로 춤을 추면서 시작됐다는 현대무용, 즉 모던 댄스라는 용어나 어렴풋이 해독하던 독자들은 포스트모던 댄스는 무엇이며, 컨템포러리 댄스는 또 무엇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이 개념들을 좀더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자. 19세기 말에 등장해 20세기를 풍미한 모던 댄스는 고정되고 획일화된 기법으로 인해 1970년대를 고비로 춤 흐름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된다. 즉, 실험성과 즉흑성으로 무장한 머스 커닝엄과 저드슨 그룹이 주도한 포스트모던 댄스에 중심 자리를 내주고 고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80년대에는 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 등 서유럽에서 새로운 현대무용이 파동하고, 1990년대 이후 미국 포스트모던 댄스와 서유럽의 새로운 무용의 세례를 받은 벨기에의 춤이 세계 공연시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이들의 춤에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영상, 극, 곡예가 혼융돼 있어서 모던 댄스나 포스트모던 댄스 등 기존의 개념으로 수용하는 데 한계가 오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컨템포러리 댄스라는 용어다. 사실 컨템포러리 댄스라는 용어는 동시대의 춤이라 하여 현대무용이 발생되던 시점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모던 댄스라는 용어에 밀려나서 한동안 사라졌다가 2000년 이후에 원래의 의미가 복권되고 현재는 무용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용어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지금 이 순간에 창작되고 있는 춤들은 무엇이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시아에는 느림을 미학으로 하는 박물관적인 전통춤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전치시켜보자. 그 많은 전통춤을 소재와 기법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많은 춤을 창작할 수 있겠는가. 아시아에는 자국의 전통춤을 바탕으로 현대화한 춤 혹은 창작춤이 무궁무진하게 개발되고 있다. 이런 춤을 아시아의 무용학자들은 아시아 컨템포러리 댄스라고 부른다.

아시아 컨템포러리 댄스의 맥락은 사실 모던 댄스에서 출발한다. 즉, 아시아의 안무가들은 액자 무대에서 공연하고 창작하는 방법을 제국주의 식민지배가 한창일 때 일본이나 미국의 현대무용가들에게서 전수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해방을 맞은 이후 민족문화의 복원 혹은 문화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자국의 전통춤과 서양의 기법을 창의적으로 혼융하는 뛰어난 재주를 발휘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계 무대에서 각광받고 있는 단체가 인도네시아의 살도노 쿠스모와 대만의 클라우드 게이트이며, 최근에는 한국에서 창무회가 주목받고 있다.

이런 아시아의 고민은 사회주의 시대를 마감한 동유럽의 안무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유럽 컨템포러리 댄스에 몸을 빌려 자국의 문화 정체성을 표현하는 해법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컨템포러리 댄스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 컨템포러리 댄스의 위력이 미치지 않으며 그 가치를 외면당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거대 상업극장이나 여러 춤 페스티벌에서 서유럽의 최신 춤을 직수입하고, 이들의 춤이야말로 컨템포러리 중의 컨템포러리 댄스라고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의 안무가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창작하는 춤을 유럽의 컨템포러리 댄스들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여러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그런 시도의 하나가 한국민족예술인연합 민족춤위원회가 해마다 주최하는 민족춤 제전이다. 민족춤 제전은 민중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항쟁의 거리에 맨발로 뛰쳐나와 강렬한 살풀이춤을 추었던 서울대의 이애주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만들어낸 민족춤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이 제전을 처음 주도한 채희완(부산대 영상예술미학과 교수), 강혜숙(국회의원), 김채현(무용원 교수) 등은 이 땅에서 우리 춤으로 새롭게 창출되는 모든 춤을 민족춤이라고 간주했고, 이를 대중과 향유하기 위해 1994년부터 축제 형식의 춤판을 벌이고 있다.

그 많은 전통춤을 소재로 삼는다면…

최근 민족춤 제전의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김채현 교수는 민족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글로컬한 축제로 성격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제전을 아우르는 주제는 여전히 사회의식을 반영하는 민중미학에 밀착되어 있다. 올해 제전의 주제는 민족해방 60주년을 상징하는 ‘알’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안무가들인 박호빈(댄스씨어터 까두 예술감독), 우현영(포즈댄스씨어터 예술감독), 한상근(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이 한국 현대사의 일면을 선무도, 현대무용, 컨템포러리 댄스, 한국춤의 몸짓에 갈음질해 작품을 출품한다. 지금 이 땅의 안무가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으며, 어떤 몸짓으로 그 고민을 표현해내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서울 공연: 11월19~21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경기 고양 공연: 11월26일 덕양어울림누리 별모래극장, 강원 정선 공연: 12월2일, 강원랜드 대연회장, 문의 02-6406-3306.


육체를 조합한 구조물의 몸짓

애크러배틱 디지털 서커스 <디아볼로>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인간의 몸짓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시대는 지난 것일까. 아니면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것 하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몸으로 모든 움직임을 실험한 안무가들이 다른 예술 장르를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영화나 건축, 오페라, 서커스 등과 교합해 전혀 새로운 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무용수의 육체에 미학적으로 접근해 무대에서 전라의 상태로 탐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탄츠테아터라 불리는 공연은 무용이 주가 되면서 연극과 음악 등을 접목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장면을 세세히 살피면 주요하게 다루는 장르가 뒤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장면이 연극 무대라면 다음은 춤 공연장이 되고, 연주회장 등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공연은 무용이 주요한 장르 구실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예술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감성적 경험을 유도한다.

때로는 디지털 미디어가 몸짓을 대신하고 무용수가 관객 속에 뛰어들어 무대의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심지어 인간의 육체와 무대 구조물이 어우러진 디지털 서커스가 등장하기도 한다. 지난 11월13일까지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애크러배틱 서커스 <디아볼로>는 무용과 다른 장르의 예술이 접목되면서 이색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초현실적인 무대세트에 인간관계와 삶의 부조리, 기계문명의 이면 등을 서커스로 표현한 것이다.

디지털 서커스라는 <디아볼로>에서 육체의 움직임은 단순한 몸짓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가 쇠 막대기가 박힌 벽, 은색 반구, 대형 범선 등의 구조물 속에서 추상적인 시적 언어로 표현된다. 예컨대 여자 무용수가 미래형 여체 조각상과 어우러져 관능적으로 속삭인다. <디아볼로>를 연출한 자크 하임은 “인간의 몸을 하나의 구조물로 보면서 어떤 구조물이 인간의 육체를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실 무대에서 몸짓만으로 일상의 기호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이때 일상 속의 세계를 응용한 구조물은 몸짓 언어를 해석하는 주요한 도구가 된다. <디아볼로>에서 육체가 고도의 미학적 형태로 거듭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대의 몸짓이 서커스를 떠올릴 만큼 놀라운 변신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아볼로>는 서커스의 진화라기보다는 몸짓언어의 확장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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