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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김승옥과 4·19의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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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4 00:00 수정 : 2008-09-1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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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에서 혁명 직후의 절망감을 발견하다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1960년 9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서울경제신문>에는 ‘파고다 영감’이라는 네 컷 만화가 연재된다. 그 시절은 4·19 혁명의 봄이자 겨울이었다. 혁명정신은 탄생과 동시에 너무 빨리 늙어버렸고, 민중들의 삶은 죽음보다 힘겨웠다. <혁명과 웃음>(천정환·김건우·이정숙 지음, 앨피 펴냄)에서 세 명의 국문학자는 ‘파고다 영감’을 통해 그 시기를 들여다본다. 지은이들이 이 책을 기획한 이유는 아마도 “그림체는 엉성하지만” 뛰어난 위트와 풍자를 보여준 김이구라는 만화가의 본명 때문일 것이다. 그 이름은 김승옥이었다. 1960년대 한국 문단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그 이름, 김승옥.

1960년 대학 1학년이었던 김승옥은 마땅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전전하다 당시 막 창간된 <서울경제신문>에 연재만화 샘플을 보냈고 뜻밖의 행운을 쥐게 된다. ‘파고다 영감’은 지금 읽어봐도 간간이 감탄사와 폭소가 터져나올 만큼 재미있다. 만화가 압축하고 있는 시대의 사회상을 풍성하게 풀어헤치는 텍스트도 놀라울 만큼 재미있다.


‘파고다 영감’에는 당시 민중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상사에게 뇌물을 바치다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먹은 회사원, 아편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밤에 과외교사의 집에 찾아가는 초등학생, 강도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강도 변장을 하는 사내, 정치 토론에서 갑자기 하숙집 딸의 미모로 토론 주제를 바꾸는 대학생들…. 이들 각각은 그 시대를 읽는 코드가 된다. 또한 일본의 ‘경제’는 탐나되 감정적인 증오는 버릴 수 없는 당시 한-일 관계의 이중성과 대미 의존적 태도도 풍자의 대상이 된다.

지은이들은 혁명정신이 실종될수록 ‘파고다 영감’에 정치 비판이 줄어들고 빈곤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늘어난다고 지적한다. 당시 ‘혁명정신’이란 용어가 일상에서 자연스레 사용될 정도로 4·19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감은 컸지만, 혁명의 과실을 우연히 땅에서 주운 민주당은 혁명정신마저 챙길 의욕이 없었다. 내분에 내분을 거듭하고 분파마다 기득권을 따먹기 급급했다. 혁명을 무덤 속에 처넣은 세력은 박정희 이전에 민주당이었다. 그래서 ‘파고다 영감’은 정치인에 대한 묘사에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가 이 모양이니 민중들의 빈곤이 끔찍할 지경에 이른 것은 당연하다. 김승옥은 빈곤이란 문제를 온몸으로 채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밥이 너무 잘 소화돼서 배고프니까 시민들은 ‘배설을 하지 말자’는 캠페인 소동을 벌인다. 파고다 영감의 다정한 친구는 신년 계획으로 지금의 쌀독을 축내고, 그 다음엔 강도질하고, 그래도 안 되면 자살한다는 계획을 말한다. 이 끔찍한 빈곤 밑에는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숨어 있다. 결국 혁명은 몇 개월 만에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만다. “옛날 옛날에 사월혁명이란 게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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