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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간으로 모자란, 신으론 충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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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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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와 함께 남미를 대표하는 반미투사로 거듭난 축구영웅 마라도나
민중의 원한을 풀어주는 신이 된 빈민가 출신, 다이어트도 신의 경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시절이 하수상하다. 우고 차베스가 좌파의 상징이 되고, 디에고 마라도나가 반미의 대표선수가 되는 시대가 나에게는 하수상해 보인다. 차베스는 쿠데타를 시도한 적이 있는 군인 출신 좌파 정치인이다. 쿠데타를 도모한 좌파 정치인이라, 이 형용모순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하다. 차베스가 ‘흠집 있는 좌파’라면, 마라도나는 ‘흠집 있는 영웅’이다. 마약중독에 극도의 비만까지, 자본주의 모순은 온통 뒤집어 썼던 마라도나가 이젠 남미를 대표하는 반미투사로 나섰다. 두 사람은 두 손을 맞잡고 미주정상회의에서 반세계화 시위대를 선동했다. 마침내 좌파정치의 코미디화가 완결됐다고 하면 화낼려나?

마라도나가 어느날 문득 투사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투사가 될만한 근본을 가지고 있다. 그가 빈민가의 소년에서 축구의 신으로 남미의 투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복기해보자. ‘축구의 신’의 탄생설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예수? 나폴리의 신!

마라도나는 1960년 10월30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여느 남미 소년들처럼 ‘디에고 알만도 마라도나’라는 긴 이름이 붙여졌다. 물론 축구는 소년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다행히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일찌기 16살에 프로선수로 데뷔했다. 빈민가 출신답게 그의 클럽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두노동자들이 만든 클럽인 ‘보카 주니어스’였다. 초기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산층의 클럽이었던 ‘리베르 플라테’가 그의 적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소년은 1978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통해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여기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신’이었다.

"축구 영웅에서 반미 선봉으로." 디에고 마라도나는 지난 10월27일 하바나에서 피텔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만나 '동지애'를 과시했다. (사진/ EPA)

마라도나의 전성기는 86년 월드컵 우승을 아르헨티나에 안기면서 시작된다. 아시다시피, 잉글랜드와 8강전에서 ‘신의 손’ 사건이 있었다. 신의 손은 10분 뒤 신의 발로 50여미터를 단독 드리블해 5명의 잉글랜드 선수를 제치고 골을 넣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아르헨티나 해설자는 “11명이 하는 축구의 개념을 깬 최초의 선수”라고 칭송했다. 마라도나는 손발로 포틀랜드 전쟁에서 패배한 아르헨티나 국민의 울분을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르헨티나의 신’이 됐다. 실제 아르헨티나에는 그를 성인으로 모시는 종교가 있다. 요컨대 마라도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예수?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신’이다. 아시다시피, 이탈리아 남부 민중들은 ‘한’ 많은 사람들이다. 못사는 남부는 잘사는 북부에 설움을 받아왔다. 축구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리그 우승컵은 북부 공업지대의 몫이었다. 토리노의 유벤투스, 밀라노의 AC 밀란과 인테르 밀란이 독점해 왔다. 중부의 AS 로마, 라치오가 겨우 견제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남부 클럽 나폴리에 87, 90년 이탈리아리그 우승, 89년 유럽축구연맹(UEFA)컵을 안겨 주었다. 공교롭게도 빈민가의 소년은 언제나 민중의 원한을 풀어주는 신이 됐다. 참고로, 마라도나 이전에도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탈리아 1부리그 순위표에서 나폴리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신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마라도나는 이탈리아 시절부터 약물에 중독돼 있었다. 91년 나폴리에서 코카인 소지혐의로 체포되는 장면은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는 스타로서 압박을 이기기 어려웠다고, 마약에 취해 축구공을 찼다고 고백했다. 마라도나는 94년 월드컵에서 마지막 승부를 꿈꾸었지만, 또다시 약물 검사에 걸려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97년 은퇴했다. 그는 그라운드 안에서도 악동었지만, 그라운드 밖에서도 기인이었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폭행을 일삼고, 기자들에게 공기총을 난사했으며, 교황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2004년에는 보카 주니어스의 경기를 보다가 마약 후유증으로 실신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위독설까지 흘러나왔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피델리스트”

"지금은 다이어트 중입니다." 마라도나는 지난 2003년 11월 중국을 방문해 베이징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살인가'라고 말했다. (사진/ EPA)

그는 마약의 독을 쿠바의 공기로 씻었다. 2004년 마약 후유증으로 쓰러진 뒤, 쿠바에서 치료를 받았다. 마라도나와 카스트로는 친구다. 마라도나는 93년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 해제를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고, 94년 처음 카스트로와 만난 뒤 가까워졌다. 축구의 신은 카스트로를 “나의 신”이라고 부른다. 그의 왼쪽 정강이에는 카스트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maximum leader’(최고의 지도자) 문신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팔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마라도나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피델리스트(Fidelist)라고 말한다. 마약을 치료하자 비만이 문제였다. 166cm에 121kg까지 불어난 마라도나는 정말 ‘굴러다니는 공’이었다. 아니 구르지도 못하는 공이었다. 그는 콜롬비아에서 위절개 수술을 받고 불과 1년만에 50kg을 감량했다. 정말 신의 경지에 오른 다이어트였다. 홀쭉해진 마라도나는 토크쇼 사회자로 돌아왔고, 빈민가의 소년은 빈민층의 대변인이 됐다. 마라도나와 카스트로 혹은 마라도나와 차베스 사이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돈키호테 기질,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마초 기질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는다. 마라도나는 인간으로서는 모자라지만, 신으로서는 충분하다. 연약한 인간이면서 위대한 신이다. 참 묘한 존재다.

추신. 마라도나 이후 세계에는 무수한 마라도나들이 있었다. 발칸의 마라도나 하지, 터키의 마라도나 엠레, 한국의 마라도나 최성국까지. 아르헨티나에는 무수한 제2의 마라도나들이 있었다. 오르테가, 리켈메, 사비올라, 테베즈, 메시까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마라도나에 범접하지도 못했다.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펠레보다 못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다르다. 내가 축구공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그는 오렌지로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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