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예술인회관, 시체놀이 지겨워요

584
등록 : 2005-11-10 00:00 수정 :

크게 작게

오아시스 프로젝트 김윤환씨의 점거예술, 목동 예술인회관에서 동숭동 720룸까지…예술계 숙원사업 정상화되면 공간재생 프로그램 가동해 세계적 명소로 가꿀 예정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들머리의 부속건물에는 커다란 현수막그림과 다양한 작품들이 노출돼 있다. 지난 10월10일부터 720시간 동안 ‘오아시스 동숭동 프로젝트 720 룸’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한동안 불법으로 증축해 분식집으로 쓰이다가 비어 있던 공간을 예술그룹 ‘오아시스 프로젝트’(www.squartist.org)에 속한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하고 예술을 실험하는 플랫폼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들이 10월3일 새벽에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은 ‘스’(Squat) 이라 불리는 ‘무단 점거’였다. 이를 둘러싸고 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김병익) 소속 건물에 10년간 얹혀 지내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와 승강이를 벌여야만 했다. 결국 정식으로 사업계획서를 낸 뒤 승인을 받아 합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 11월2일 ‘동숭동 프로젝트 룸’에 들어섰을 때 미술가 김윤환(40)씨는 새로 전시된 작품들을 카메라 렌즈에 담고 있었다. 예술 오아시스로 거듭난 공간에서 예전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라이언 시건 스미스(영국)가 ‘무장된 독학예술’을 주제로 미술에 관한 아이디어를 새긴 나무판은 분식집의 메뉴판으로 쓰이던 물건이었다. 퍼포먼스 아티스트 쳉시춘·예이리(대만)는 서울 공연 장면을 사진에 담아 벽면을 장식했으며, 환기구와 들보 등지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SP 38(프랑스)의 여러 비행기 그림이, 천장에는 월리암 캐논 헌터(캐나다)가 룸을 방문해 즉석에서 그린 작은 걸개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분식집 스쾃, 현수막 그림 주렁주렁

점거예술로 공간재생을 시도하는 프로젝트의 김윤환씨. (사진/ 박승화 기자)

이쯤되면 자유로운 국적 불명의 전시장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숭동 프로젝트 룸’의 한 면일 뿐이다. 잠시 화가 정정엽씨의 ‘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5~2005’로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동숭동 프로젝트 룸’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 이 작품에선 20여 년 동안 서울에서 10여 차례나 작업실을 옮겨다닌 정씨의 사정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2004년 연보엔 ‘연립주택 작업실 20평에서 15평으로 이사. 캔버스 100호 30개를 둘 곳이 없음. 일주일에 걸쳐 천과 액자로 분리’라는 말이 그림 옆에 쓰여 있다. 그 아래엔 ‘동네 빈 파출소를 작업실로 쓰려고 공공기관에 문의했지만 허사로 끝남’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그런 현실이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결성한 계기였다. 2년 전 이맘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김윤환씨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공간에 대한 개념적 작업을 하는 김씨가 서울에서 작업 공간을 마련하는 게 꿈같은 일이었다. 파리시 전역에 있는 20여 개의 예술 스 가운데 하나로 은행 건물을 이용하는 ‘알터나시옹’에서 6개월가량 지낸 경험을 어디에도 풀어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미술인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사이트에 ‘희망을 새긴 장난글’을 올렸다. ‘20평 작업실을 보증금 없이 월 5만원에 세놓음’이라고. 이를 계기로 뜻을 같이하는 아티스트들이 만나 작업실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난해 2월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결성했다.

“예술가들에게 작업실은 생존의 뿌리다. 예술가들이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환원할 기회를 갖도록 해야 모든 사람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 예술가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다.” 예술가들의 작업실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을 찾던 김씨는 오아시스 프로젝트 결성과 동시에 서울 양천구 목동에 흉물로 방치된 ‘예술인회관’의 제자리 찾기에 나섰다. 올해로 6년째 예술인회관 건립 공사가 중단된 것은 예총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활력이 멍든 데는 문화관광부의 눈치보기식 예술행정도 한몫 거들고 있었다.

검찰로부터 수사받는 예총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유럽의 오픈 스쾃에 초대돼 공연을 하고(위),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사진/ 오아시스 프로젝트)

아무리 예술인회관 건립을 위한 국고가 콘크리트 더미에서 썩고 있어도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부와 예총은 사업 정상화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정부는 국고 165억원을 지원했으면서도 예총에 찍소리를 내지 못했다. 어차피 예총이 예총회관을 국가에 기부채납하면서 받은 돈(105억원)으로 토지를 매입했기에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총은 국고 지원금을 종자돈 삼아 오피스텔 부지를 확장하는 식으로 임대 사업 계획만 작성할 뿐 예술인들의 작업실 문제 해결에는 뜻이 없었다. 그것도 남은 공사비를 충당할 여력이 없어 국고로 별도 지원한 50억원에 대한 환수조치 명령을 따라야 했다.

현재 오아시스 프로젝트에는 5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속해 있으며 20여 명이 주도적으로 ‘행동’한다. 지난해 7월 오아시스 프로젝트에서 추진한 예술인회관 분양 공모에 참여한 예술가들로 미술가뿐만 아니라 사진가·무용가·음악가·연극인 등 문화예술 전반을 아울렀다. 이들은 분양 신청서를 접수한 뒤 모델 하우스를 방문하고 한나절 입주식을 갖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예총의 ‘심기’를 건드려 법정 다툼 끝에 지난 6월3일 일부 예술가들이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당시 벌금형 50만원을 선고받은 김윤환씨는 “재판부가 벌금액을 낮추고 선고유예를 결정하는 전향적 판결을 했지만 점거예술의 사회문화적 정당성을 확신하며 유죄 판결에 항소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예술인회관 건립 정상화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지난 10월28일 예술인회관 공사 비리 의혹 규명을 위해 예총 사무실을 압수수색(10월18일)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무혐의로 종결된 사안과 별개로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금품 로비 의혹이 구체적으로 제기된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목동 예술인회관 건립사업 정상화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는 지난 10월31일 성명을 통해 “예총이 예술인회관 건립사업에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면서 예총의 운영실태 전반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하고 문화관광부가 사업의 책임주체로서 사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예술인회관 건립 정상화를 위한 해법은 없는 것일까. 일단 행정당국이 예술계의 ‘권력단체’에 뭉칫돈을 대주면서도 관리 감독이 소홀했던 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술계의 상처를 치유하고 창조적 에너지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문화관광부에서 공식 대책기구를 꾸리고 사업주체를 변경하는 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몇 가지 방법으로 △정상화 이전에 매각해 빚잔치 △완공 뒤 매각해 새 예술인회관 추진 △국고 지원 완공으로 문화예술위원회 소유·범예술계 운영 등이 거론되고 있다.

“예술인회관, 우리가 꾸밀 수 있다”

“예총이 소유권을 포기하고 문광부가 행정의 실패를 인정하면 사태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지금 53%의 공정을 끝낸 상태에서라도 예술가들에게 운영을 맡기면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 수 있다. 지하 5층, 지상 20층 1만1600평의 공간을 예술적으로 변모시킬 무궁무진한 방법이 있다.” 이런 김윤환씨의 바람이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다. 새건축사협회 함인선(AI 건축)씨는 내부 공사를 하지 않았지만 용도변경을 신청하면 법적으로 준공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예총에 지원했다 환수한 50억원을 지원하면 엘리베이터에 상하수·전기 시설 등까지 갖출 수 있다.

그동안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예술인회관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간에서 실험적 작업을 벌였다. 올해 2월부터 6개월 동안 홍익대 앞 걷고 싶은 거리에서 이동식 예술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삶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를 꾀했고, 5월에는 프랑스 파리 벨빌과 독일 뮌스터 예술 스의 오픈 스튜디오에 초대받아 전시와 퍼포먼스를 했다. 이런 왕성한 활동 ‘덕분’에 시민과 공무원 등에게서 도심 빈 터(옛 예화초등학교, 남부터미널·숭례문·단성사 지하도 등)에 대한 예술 스을 제안받기도 했다. 11월9일 ‘동숭동 프로젝트의 720 룸’의 깃발을 내려도 ‘무허가 건물’이 도심의 숨통을 틔우는 예술 오아시스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까.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