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게 썩어가는 브라질 슬럼가의 총소리, 영화 <시티 오브 갓>
삼바음악·핸드레일로 만든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에 ‘폭력의 순환’ 리얼 ▣ 남다은/ 영화평론가 영화의 도입부, 경찰과 갱단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이 벌어진다. 양쪽 진영의 경계에 한 소년이 위태롭게 서 있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시티 오브 갓에서는 내빼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말문이 막힌다. 어찌됐건, 죽는 곳.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는 그렇게 처음부터 우리를 극단의 지점으로 몰아세운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으므로 나의 죽음을, 당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버림받은 도시의 이야기. 그런데 이건 현실이다. <시티 오브 갓>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세공된 긴장감 넘치는 허구가 아니라, 30년 이상을 세상에서 외면당해온 브라질의 ‘어느’ 슬럼가, 외롭게 썩어가는 한 빈민도시의 역사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도시의 생명력이 저주의 악순환에 고립되고,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뒤, 영화는 뒤늦게 이 폐쇄된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묻는다. 이제 당신은 적어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원작자 파울루 린스는 시티 오브 갓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총 대신 펜을 선택했고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다. 자신의 실제 경험과 10년간의 조사를 바탕으로 출간된 그의 소설은 수많은 캐릭터를 통해 시티 오브 갓의 30년에 걸친 역사를 재현해냈다. 고립됐던 도시의 역사가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중산층 백인 사회의 엘리트들은 적어도, 이 도시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1970년대 극에 달한 총살전 실화
도시 밖에서, 도시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감독 페르난두 메이렐레스 역시 그런 경우였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이 저주의 도시 내부로 진입해본 적 없던 그는 린스와 함께 소설의 영화화를 결심한다. 실로 엄청난 분량과 무게의 실화는 실제 사건과 가공된 인물들로 다시 구성되어, 시티 오브 갓의 한 구역에서 촬영을 시작하게 된다. 감독은 대부분의 배우들, 특히 아역들을 도시 내부에서 발탁해 연기수업을 병행했다. 그건 어린 배우들에게 총 대신 연기의 꿈을 심어주어, 자신의 힘으로 타락한 도시를 탈출하고자 하는 희망의 빛을 선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죽이는 대신 펜을 들고, 마약을 파는 대신 연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절박함에 의해 이 영화의 현실성은 획득된다.
영화는 시티 오브 갓을 지배했던 1960년대 갱들의 에피소드에서 시작해 범죄가 극에 달한 70년대의 상황까지, 한 소년의 내레이션을 바탕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티 오브 갓에는 강도를 일삼으며 도시에서의 탈출을 꿈꿨던 갱들 대신, 무자비한 살인으로 도시를 평정하려는 살인마들만 남게 된다. 가장 끔찍한 것은 끊임없이 자라는 범죄의 씨앗이다. 예컨대 60년대에 어설픈 갱들을 따라다니며 폭력을 내면화한 꼬마가 70년대의 가장 잔인한 갱단 두목이 되어 어린아이들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결국 그 아이들의 손에 살해되는 것과 같은 이야기. 이 도시의 폭력은 끝없이, 매우 빠르게 순환된다. 영화의 진행 역시 도시의 흐름을 좇아, 그 살벌한 풍경들은 카메라의 화려한 움직임과 감각적인 음악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반복되는 핸드헬드와 점프컷, 그리고 신나는 삼바 음악 위에 던져진 도시의 폭력은 마치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러한 스타일로 인해, 브라질 리얼리즘 운동에 익숙한 다수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가벼운 재현 기법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를 보고 있자면, 현실의 극단에 위치한 시공간을 영화화하기 위해, 가장 정직한 미학적 태도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여기저기 널브러진 주검들을 훑으면서도 그 주검에서 흐르는 피에 대해 성찰할 시간을 주지 않는 카메라가 자기 방어 본능만 남은 이 도시의 냉정한 생존 전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색상으로 변화하는 영화의 화려한 톤 역시 외부와 분리된 지옥의 열기를 뿜어내며, 비현실적인 살육의 도시를 현실화하고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지옥의 풍경들이 한 도시 안에 혹은 한 영화 안에 고립되지 않고 현실 밖으로 나올 수 있지, 과연 우리는 그들의 삶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와 같은 무거운 물음을 던지면서 말이다.
저주의 땅을 버릴 것인가
영화 전반에 걸친 내레이션을 통해 도시의 참혹함을 증언했던 소년은 “총에 맞아 죽기 싫다”고 했다. 그는 죽기 싫어서, 도시를 떠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죽음을 무릅쓰며 도시 한가운데 선다. 죽지 않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들의 도시. 영화 속 소년은 그렇게 살아남았고, 영화의 원작자 린스는 마침내 도시를 벗어났고,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30년을 축약한 2시간의 역사, 고작 그 2시간의 역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탈출했고, 살아남았음에도 여전히 이 도시의 그림자는 잊혀지지 않는다. 떠난 사람들도, 떠날 사람들도 아닌, 남겨질 사람들, 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지속되는 시티 오브 갓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시 밖으로 마침내 나온 소년과 린스와 우리는 이 저주받은 시티 오브 갓을 버릴 것인가? 떠난 뒤 버리는 것만이 가장 현실적인, 유일한 선택일까.
삼바음악·핸드레일로 만든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에 ‘폭력의 순환’ 리얼 ▣ 남다은/ 영화평론가 영화의 도입부, 경찰과 갱단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이 벌어진다. 양쪽 진영의 경계에 한 소년이 위태롭게 서 있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시티 오브 갓에서는 내빼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말문이 막힌다. 어찌됐건, 죽는 곳.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는 그렇게 처음부터 우리를 극단의 지점으로 몰아세운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으므로 나의 죽음을, 당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버림받은 도시의 이야기. 그런데 이건 현실이다. <시티 오브 갓>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세공된 긴장감 넘치는 허구가 아니라, 30년 이상을 세상에서 외면당해온 브라질의 ‘어느’ 슬럼가, 외롭게 썩어가는 한 빈민도시의 역사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도시의 생명력이 저주의 악순환에 고립되고,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뒤, 영화는 뒤늦게 이 폐쇄된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묻는다. 이제 당신은 적어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원작자 파울루 린스는 시티 오브 갓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총 대신 펜을 선택했고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다. 자신의 실제 경험과 10년간의 조사를 바탕으로 출간된 그의 소설은 수많은 캐릭터를 통해 시티 오브 갓의 30년에 걸친 역사를 재현해냈다. 고립됐던 도시의 역사가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중산층 백인 사회의 엘리트들은 적어도, 이 도시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1970년대 극에 달한 총살전 실화

어설픈 갱을 따라다니며 폭력을 내면화한 꽘가자라 다시 아이들의 손에 총을 쥐어준다. '시티 오브 갓'에서 폭력은 끊임없이 순환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