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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성과 악성, 그리고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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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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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사이에 둔 괴테와 베토벤의 삼각관계… 로맹 롤랑이 들여다본 그들의 삶과 예술의 열정

세상에는 별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묘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역사 속 유명인물들도 그런 잘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맺어진 사례들이 많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은 동시대 인물들이었지만 실제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지금이야 바흐의 위상이 더욱 높이 평가되지만, 당시만 해도 헨델은 최고의 인기작곡가였고 바흐는 그저 초야의 이름없는 작곡가였을 뿐이어서 음악이란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둘이 만날 기회는 전혀 없었다. 바흐는 독일의 시골에 묻혀 평생을 보냈지만, 헨델은 당시 국제사회의 중심지 런던 등에 머물면서 평생을 영화롭게 보냈다. 그런데 이들 두 거장을 이어주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바흐는 말년에 눈이 나빠져 치료를 받았는데 돌팔이 의사에게 걸려 시력이 더 나빠지고 말았다. 그 의사는 그뒤 얼마 안 있어 헨델도 치료했다. 물론 엉터리 치료였고 헨델은 아예 실명하고 말았다. 헨델과 바흐는 살아생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이들 두 음악가는 한 돌팔이 의사라는 끈으로 서로 연결된다.

베토벤을 흠모했던 대문호


사진/베티나의 초상.
스페인이 자랑하는 현대미술의 두 거장 피카소와 달리도 미술세계는 완전히 다르지만 흔치 않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바로 두 사람이 같은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뒷날 살바도르 달리의 부인이 된 갈라가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을 당시 피카소와 밀애를 나눈 적이 있다. 1920년대 표현주의 화가의 대명사 막스 에른스트와 사귀기도 했던 갈라는 피카소와 달리라는 두 거장과 삼각관계를 이룬 사이였다. 갈라라는 한 여인을 둘러싼 예술가들의 두 삼각관계는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는 촉매이기도 했다.

괴테(1749∼1832)와 베토벤(1770∼1827)이란 두 위대한 예술가도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피카소와 달리처럼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의 주인공들이었다. 분야가 서로 달랐고, 나이차가 스물한살이나 됐지만 대문호와 악성은 베티나란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운명적으로 이어졌다. 시성과 악성의 이 운명적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는 사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숨겨진 이야기를 파고들어 이들의 운명을 소설 같은 전기로 다시 풀어낸 인물이 바로 로맹 롤랑이다.

프랑스의 전기작가로 소설 <장 크리스토프> 등의 작품을 발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롤랑은 평생에 걸쳐 베토벤을 흠모하고 그를 정신적인 스승이자 벗으로 여겨 베토벤의 자취가 서려 있는 독일 전역을 구석구석 누볐고, 비엔나까지 찾아가 치밀하게 자료를 모았다. <베토벤의 생애>, <베토벤 대창조기> 등의 저작을 남겼고, 베토벤과 괴테의 애증섞인 관계를 <괴테와 베토벤>이란 소설 같은 전기로 썼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괴테와 베토벤>(박영구 옮김, 웅진닷컴 펴냄, 7500원)이 최근 국내에 소개됐다.

“1811년, 그리고 1812년. 결실의 계절 가을의 풍요로움이 어디에나 넘쳐흘렀다. 포도를 수확하는 장면들이 펼쳐지고, 황금빛으로 물든 숲과 들판에는 저녁노을이 번져갔다. 한 작품을 제외한 마지막 두 교향곡과 마지막 바이올린 소나타가 탄생했으며, 아름다운 며칠 동안 마지막 사랑이 타올랐다. 그리고 베토벤과 괴테라는 두 거성의 짧은 만남이 있었다. 문학과 음악의 두 별이 마주치는 이 순간을 운명은 수세기 동안이나 기다려왔고, 마침내 그 순간이 왔던 것이다.”

사진/베토벤이 괴테에게 바친 가곡 <슬픔과 기쁨> 악보(1810년).
소설처럼 시작하는 책은 괴테와 베토벤을 사로잡은 베티나에 대한 이야기로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바로 베토벤이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에 가락을 붙이던 마흔살 무렵이었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베토벤은 마침 사귀던 연인과 헤어진 뒤였고, 때맞춰 등장한 베티나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당시 베티나는 25살이었다.

기묘하게도 베티나는 괴테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의 딸이었다. 베티나는 1811년 귀족 시인 아르님과 결혼했지만 1806년부터 괴테에 대해 열정을 품고 있었다. 괴테의 어머니와 말벗이 돼 괴테의 집안을 자주 출입했던 베티나는 괴테 어머니의 주선으로 1807년 괴테를 처음 만났고, 그뒤 죽을 때까지 괴테에게 예속된 인생을 보냈다. 그런 베티나의 마음을 잠시나마 사로잡았던 인물이 베토벤이었다. 베티나가 베토벤을 만난 것은 1812년. 바로 괴테가 테플리츠에서 베토벤을 처음 만난 시점과 며칠 사이였다. 마침 괴테와 대판 싸우고 감정이 상해 있었던 베티나는 베토벤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롤랑에 따르면 괴테와 베토벤 두 사람은 직접 만나기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사뭇 달랐다. 두 사람 가운데 상대방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이는 베토벤이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부터 괴테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그를 존경해 그의 작품을 거의 날마다 읽었다고 한다. 1811년 4월 베토벤이 괴테에게 보낸 편지는 괴테에 대한 베토벤의 존경과 사모의 심정이 드러낸다.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을 알게 된 그 오랜 시간에 대해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삶, 사랑, 헤어짐

사진/베토벤(왼쪽)과 괴테.
하지만 두 사람의 교류는 금방 끝났다. 베티나와 베토벤의 사이를 질투한 괴테는 이내 베토벤에 대해 노하고 말았다. 베토벤도 괴테를 만난 뒤 “시인답지 않게 너무 궁정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하며 그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짧은 만남과 교류 끝에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책은 이들의 만남부터 헤어짐, 그리고 각자가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베티나라는 존재가 두 예술가에게 준 영감과 베티나가 일으킨 인간적 번민과 애증에 얽힌 이야기를 담았다. 롤랑의 작품이고, 위대한 두 거장의 이야기인 만큼 삼각관계의 진부하고 세속적인 흥미위주의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롤랑은 특유의 힘있고 단정한 문체로 이들의 예술적 열정과 인간적인 면을 잘 버무려 독특한 사랑의 기록으로 재구성했다. 베티나라는 여주인공 역시 팜므파탈이나 사랑에 눈먼 여인이 아니라 강한 개성과 주관으로 다부진 일생을 살아가며 두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인간형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롤랑이 베토벤의 영원한 팬이었다고는 해도 괴테보다 베토벤을 높이 세우거나 베토벤의 입장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롤랑의 절절한 문장은 문득문득 베토벤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을 넌지시 깨닫게 하기도 한다.

사실 베티나의 사랑은 해피엔드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알려주며 출발했던 이야기는 예술의 세계와 지적인 분위기로 이어지다가 마지막 4부에서 사랑의 종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을 주소재로 삼고 있지만 풍성한 주와 당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삽화가 잘 곁들여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적 족적을 남긴 두 인물의 전공 외적인 면모를 함께 엿보는 것은 이 책의 또다른 재미다. 이제는 예스럽게 느껴지는 1세기 전의 문체가 처음에는 다소 어색할 수도 있지만 천재이면서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강렬하지 않아도 은근한 재미로 읽는 이를 잡아당긴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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