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가 중계권 구입 않기로 담합한 한국 프로농구의 추운 겨울
1990년대 열병을 앓았던 ‘농구대잔치 키드’의 추억만이 강해지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찬바람이 불면, 나는 설레었다. 농구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농구대잔치 키드’였다. 아, 어찌 잊으랴. 손을 호호 불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서둘러 뛰어 올라가던 종합운동장역의 계단을. 어쩌다 장충체육관을 스칠 때면 아직도 생생하다. 동대입구역 계단에서 낡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암표를 팔던 아주머니를(잘 지내세요?). 나의 농구대잔치는 1980년대 중반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해서 90년대 중반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끝났다. 그사이 독서실 간다고 ‘뻥’치고 농구장에 갔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사회로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은 대학 졸업생으로 변했다. 그리고 프로농구가 시작됐다. 강산이 변하기도 전에, 장충체육관이 후줄근해졌듯 농구 인기도 시들해졌다. ‘람보슈터 문경은’ ‘산소 같은 남자 이상민’ ‘피터팬 김병철’, 밤새 만든 피켓을 들고 아침부터 경기장 주변을 서성이던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고생의 ‘연대’에 반발해 남자의 ‘고대’를 응원했던 오빠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오빠부대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X세대의 스포츠였다
언젠부턴가 찬바람이 불어도 별로 설레지 않는다. 나의 농구인생은 농구대잔치와 함께 끝났다. 지금도 가끔 프로농구 중계를 보지만, 슛 하나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순수한 몰입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나만 시들한 것이 아닌 듯하다. 이제 농구는 공중파에서 중계를 외면하는 신세가 됐다. 격세지감이다. 물론 꾸준한 농구팬들이 있다(그들에게 경배를). 인기 스포츠의 지위도 유지한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 한국 농구처럼 빠르게 열풍에 휩싸이고, 쉽사리 열기가 식어버린 스포츠도 드물지 않을까?
90년대는 ‘농구 혁명’의 시대였다. 언니들은 오빠들의 플레이에 자지러졌고, 오빠들은 모이면 농구장으로 달려갔다. 농구는 보는 스포츠뿐 아니라 하는 스포츠로도 열풍을 일으켰다. 저변이 깊었다는 말씀. 농구혁명을 주도한 세대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였다. 그러니까 농구는 이른바 X세대의 스포츠였다. X세대에 의해 축구의 집단주의는 농구의 개인주의로 대체됐다. 참고로, 농구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스포츠다. 농구 열병은 빠르게 퍼졌다. 80년대 후반에 점화돼 90년대 중반에 절정을 이루었다. 적어도 10~20대 사이에서는 단숨에 축구 열기를 눌렀고, 야구 인기를 위협했다. 당시 젊은이들은 <슬램덩크>를 읽고, <마지막 승부>를 보고, ‘덩크슛’을 불렀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는 농구 태풍의 핵이었다. 주인공은 강백호와 서태웅. 그 사이의 소연. 근본 없는 강백호가 농구 엘리트 서태웅에 도전하는, 사랑과 명예의 경쟁을 벌이는 삼각구도는 94년에 방송된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도 재현됐다. 아직도 심은하는 <마지막 승부>의 다슬이로 기억된다. 강백호 같은 장동건과 서태웅을 닮은 손지창도 기억한다. 이처럼 농구는 청춘의 상징이었다. 이승환의 ‘덩크슛’은 어떤가. 이승환은 “예쁜 여자친구와 빨간 차도 갖고 싶었지만/ 너무나 원했던 것은… 덩크슛… 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라고 노래했다. 심지어 덩크슛이 여자친구, 자동차보다 간절한 소망이라니!
태초에 라이벌이 있었다. 농구대잔치의 라이벌 구도는 삼성과 현대, 현대와 기아, 기아와 연대, 연대와 고대로 변해가며 흥미를 더했다. 지역 연고가 뿌리 내리기 힘든 토양에서 학벌주의와 기업경쟁은 라이벌을 만들어내기 가장 좋은 통로였다. 그리고 90년대는 조든의 시대였다. 찰스 바클리, 하킴 올라주원 같은 불세출의 스타들도 농구의 만신전을 수놓았다. 당시에는 농구대잔치는 물론 미국 프로농구(NBA) 경기도 공중파로 볼 수 있었다. 격세지감이다. 올해는 돈을 들이지 않으면 중계도 볼 수 없다. 프로농구를 케이블 채널인 엑스포츠(Xports)에서만 중계하기 때문이다. 공중파 방송사가 중계권을 사지 않기로 담합했단다. 문제는 올해만 아니다. 지난해 프로농구 270경기 중 15경기만이 공중파로 중계됐다. 공중파의 홀대도 농구 열기에 찬물을 부어왔다.
국가주의적 감동과 스타덤이 없어서?
90년대 후반, 박찬호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농구 인기는 저물기 시작했다. 당시는 한국 스포츠의 무대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넓어지는 전환기였다. 하지만 농구의 박찬호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키 때문이다. 태극마크 없는 국가대표가 세계 무대에서 성공하는 동안, 국가주의 영웅이 없는 농구는 외면당했다. 솔직히 하승진에게 농구의 박찬호를 기대하기란 무리다. 야구에 이어 축구도 탈아입구했다. 알다시피 월드컵 4강. 고작 아시아의 맹주를 다투는 농구에 눈높이가 높아진 국민들이 만족하기 어렵다. 농구에는 ‘애국의 열정’을 자극할 국가주의적 감동이 부족한 것이다. 농구의 세계 4강? 가능성은 ‘없다’. 아무리 아디다스가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라고 떠들어도, 한국인의 신체조건으로 세계 4강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리고 또 하나. 프로농구에서 외국인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프로 스포츠보다 훨씬 높다. 주전 5명 중에서 2명. 대략 승부의 60%를 외국인 선수들이 좌우한다. 불행히도 한국에서 외국인 선수는 ‘외국인’이지 ‘선수’가 아니다. 단일민족 국민은 도통 외국인에게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하여 언니들이 떠났고, 오빠들도 시들해졌다. 농구 대신 인라인 같은 진화된 개인주의 스포츠도 유행했다. 더구나 90년대 후반 별들의 전쟁이 끝나면서 스타덤도 고갈되기 시작했다. 옛 오빠들은 유부남이 됐는데 젊은 오빠들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의 겨울은 점점 추워졌다. 그래서 농구대잔치의 추억은 힘이 세다.
1990년대 열병을 앓았던 ‘농구대잔치 키드’의 추억만이 강해지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찬바람이 불면, 나는 설레었다. 농구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농구대잔치 키드’였다. 아, 어찌 잊으랴. 손을 호호 불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서둘러 뛰어 올라가던 종합운동장역의 계단을. 어쩌다 장충체육관을 스칠 때면 아직도 생생하다. 동대입구역 계단에서 낡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암표를 팔던 아주머니를(잘 지내세요?). 나의 농구대잔치는 1980년대 중반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해서 90년대 중반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끝났다. 그사이 독서실 간다고 ‘뻥’치고 농구장에 갔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사회로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은 대학 졸업생으로 변했다. 그리고 프로농구가 시작됐다. 강산이 변하기도 전에, 장충체육관이 후줄근해졌듯 농구 인기도 시들해졌다. ‘람보슈터 문경은’ ‘산소 같은 남자 이상민’ ‘피터팬 김병철’, 밤새 만든 피켓을 들고 아침부터 경기장 주변을 서성이던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고생의 ‘연대’에 반발해 남자의 ‘고대’를 응원했던 오빠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오빠부대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X세대의 스포츠였다
언젠부턴가 찬바람이 불어도 별로 설레지 않는다. 나의 농구인생은 농구대잔치와 함께 끝났다. 지금도 가끔 프로농구 중계를 보지만, 슛 하나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순수한 몰입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나만 시들한 것이 아닌 듯하다. 이제 농구는 공중파에서 중계를 외면하는 신세가 됐다. 격세지감이다. 물론 꾸준한 농구팬들이 있다(그들에게 경배를). 인기 스포츠의 지위도 유지한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 한국 농구처럼 빠르게 열풍에 휩싸이고, 쉽사리 열기가 식어버린 스포츠도 드물지 않을까?

농구대잔치 시절, 팬들의 함성 소리에 심판의 호각 소리가 묻힐 만큼 경기장은 열기로 뜨거웠다. 1996년 연세대학교 농구팀을 응원하고 있는 팬들.

'에어조든'이 혀를 내밀면, 무언가 '묘기'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