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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적 햄릿들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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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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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 등장한 세 명의 햄릿들
민요 조성과 전통 춤사위로 소화해 낸 이윤택 연출작 돋보여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국내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처음 소개된 게 80여년 전의 일이다. 식민지 조선의 극작가 현철이 완역본 <햄릿>을 ‘하믈레트’라는 제목으로 잡지 <개벽>에 1921년 모두 19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뒤 한국전쟁 와중에 피난지 대구에서 이해랑 선생이 연극 <햄릿>을 무대에 올렸다. 이를 계기로 실로 다양한 <햄릿>을 무대에서 만났다. 심지어 ‘말의 성찬’이라는 <햄릿>의 근본을 해체하고 소리와 움직임만으로 극을 이어가는 극단 노뜰의 <동방의 햄릿>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물놀이 가락이 어울릴 줄이야


우리는 얼마나 다른 <햄릿>을 만날 수 있을까. 국립극장이 마련한 셰익스피어 만찬의 메인 요리로 <햄릿>을 꼽을 만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본격적인 셰익스피어 페스티벌로서 ‘문화 브랜드’를 지향하는 올해 ‘난장’에 참여한 일곱 작품 가운데 세 작품이 <햄릿>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 구조를 깔끔하게 정리한 동국대학극장의 <햄릿>이 동양적 정서를 서구적 이미지로 색칠했다면 ‘연희단거리패’의 <햄릿>은 무덤 앞에서 벌이는 삶의 난장이 돋보이고, 공연창작 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은 비극을 한바탕 놀이극으로 즐길 수 있다.

여기에서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이윤택 연출의 <햄릿>을 10년의 관록을 여지없이 느끼게 했다. 익숙한 원전을 해체해 재구성하는 솜씨로 겨룬다면 당해낼 사람이 없을 이윤택 연출의 묘미가 그대로 살아났다. 사랑과 운명, 권력과 음모 등을 통해 캐릭터간의 대립구도를 명확히 하면서도 지금 우리 곁에 있는 <햄릿>에 다가서도록 했다. 이미 러시아, 독일, 일본 등지에서 공연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이 ‘한국적’ 냄새를 더욱 진하게 풍겼다. 이제는 ‘한국의 <햄릿>’이라는 말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요즘 한국적 이미지 차용은 연극판에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창적 무대구성이 흔한 변주곡에 머물 위험도 없지 않았다. 역시 이윤택은 달랐다. 사물놀이의 가락과 악기가 <햄릿>에 그토록 어울린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오필리어의 노래엔 민요의 조성을 담았고 몸짓엔 전통의 춤사위가 배어 있었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던 4년 전의 젊은 무대가 노천극장으로 옮겨지면서 느낌의 강도를 더했다. 마치 우리의 마당극을 셰익스피어 시대의 ‘글로브 극장’에서 선보이는 듯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 <햄릿>을 재구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일까. 악기의 가락이 어긋나거나 열린 공간에서 외부의 소음이 극의 진행을 가로막기도 했다. 더욱이 너무나 분명한 선악 구별짓기는 자칫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저마다의 <햄릿>을 만나는 것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런 아쉬움은 배우들의 신들린 ??? 충분히 용서받았다. 예컨대 무덤 속으로 가라앉던 레어티즈가 ‘산 자를 죽은 자와 같이 묻으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던 순간, 쏟아지는 흙에도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던 오필리어의 연기는 쉽게 잊히지 않으리라.

그렇게 한국식을 전수받은 ‘햄릿’은 거대한 대지(무대를 덮은 황색 천)를 뚫고 2층 무대 위로 오른다. 그리스의 신상이 되어 예수처럼 부활하는 장면이다. 몽상가 햄릿이 벗은 몸으로나마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셈이다. 만일 신격화된 ‘햄릿’이 부담스러웠다면 <노래하듯이 햄릿>으로 익살광대의 연기로 ‘햄릿’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어볼 만하다. 비극적인 햄릿의 삶을 유쾌하게 버무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웃음 하나하나에 햄릿의 심리가 그대로 배어 있다. 여전히 햄릿은 색다른 볼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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