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이제는 돌아와 마운드에 선…

579
등록 : 2005-10-06 00:00 수정 :

크게 작게

[신윤동욱의 스포츠 일러스트]

마침내 ‘선수’로 복귀한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조성민과의 만남
“트러블 메이커 아닌 야구선수로 남고 싶어 포스트 시즌 최선 다할 것”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검게 그을린 얼굴이 낯설었다. 결혼할 즈음에는 정장 차림으로, 시끄러울 때는 초췌한 얼굴로, 가끔은 안경까지 낀 모습으로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통해 그를 보곤 했던 사람으로서는 조금 낯선 조성민이었다. 그을린 얼굴에 검은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난 그에게서 땀냄새가 풍길 듯했다. 조성민이 마침내 ‘선수’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서른둘, 이제는 돌아와 마운드에 선 조성민을 9월24일 오후 인천에서 만났다.


한 5년쯤은 되지 않았나…. 대충 그렇게 짐작했다. 그런데 3년이란다. 조성민이 선수로 복귀한 햇수 말이다. 200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은퇴하고 2005년 한화 이글스의 선수로 돌아왔다. 선수 조성민이 그토록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인간 조성민에게 3년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의 소식은 스포츠 뉴스가 아니라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 중계됐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묻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다만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조금은 초연하게 들리는 그의 말투에서 지난 일들이 남긴 흔적이 느껴졌다. 짧은 만남 뒤의 인상 비평에 불과하지만, 그는 큰일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닌 듯했다. “제 복이죠.” 선수로서, 인간으로서 안타까웠던 순간에 대해 물을 때마다 그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한 대답이다.

조성민 선수는 "마운드에 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9월4일 두산전에 나선 조성민. (사진/ 연합)

너무 빠른 은퇴였다. 조성민이 일본에서 은퇴할 때의 나이가 29살. 아무리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에 시달렸다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성급한 은퇴였다. 그는 “외국인 선수 엔트리가 제한돼 있어서 몸 상태가 좋을 때도 경기에 나서지 못할 때가 많았다”며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운동을 제대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아픈 척했다”고 말했다. 그는 팔꿈치가 아프다고 ‘우겨서’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은퇴에 앞서 2000년 조성민은 최진실과 결혼했다. 그가 은퇴하자 사람들은 짐작했다. 이제는 연예인 하려나 보지 뭐. 아니면 사업을 하려나. 그리고 조성민이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확신했다. 정말 야구는 안 하려나 보다. 그리고 사생활 문제가 터졌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랐다. 사람들의 짐작과 달리 조성민은 선수로 돌아오려 했다. 그는 2003년, 2004년 한국 프로야구 드래프트 신청을 했지만 ‘물’을 먹었다. 드래프트에서 탈락하자 2003년에는 ‘야구는 여기까지겠구나’, 2004년에는 ‘야구장은 쳐다도 안 본다’고 생각했단다. 돌이켜보면, 그가 선수로 지명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스포츠 뉴스의 단신으로 들었던 듯도 하다. 하지만 스포츠 뉴스의 단신은 연예 프로그램의 특종에 묻혔다.

일본 야구계의 차별, 사업에 대한 고집

벙어리 냉가슴도 앓아야 했다. 아프지 않아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은퇴할 때 일본 구단과의 계약이 1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사업은 복귀의 걸림돌이었다. 그가 드래프트를 신청하면 기자들은 물었다. “사업은 정리하는 겁니까?” 그는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는 “일본 선수들은 부업을 가진 경우가 많다”며 “나는 야구를 주업으로 사업을 부업으로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사업을 정리 안 하면 야구를 정리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야구계의 풍토를 잘 몰랐던 탓”이라면서도 “이제 생각해보면 남들이 무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운동에 미련을 접지 못해 웨이트 트레이닝은 꾸준히 했다.

“찬호가 운이 좋았죠”

(사진/ 류우종 기자)

마침내 포기했을 때, 마지막 기회는 찾아왔다. 지난 5월, 한화 이글스의 김인식 감독이 조성민을 선수로 불렀다. 3년 쉬고 3개월 운동했다. 8월15일 첫 복귀전에서 첫 승을 따냈다. 행운도 따랐다. 그가 마운드에 오르면 타선이 폭발했다. 호수비로 받쳐주었다. 조성민의 별명은 풍운아에서 행운아로 바뀌었다. 중간계투 요원인 그가 4회쯤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하면 대전 팬들이 “조성민!”을 연호하는 조성민 타임도 생겼다. 9월15일까지 2승1패4홀드, 방어율 3.45로 잘 던졌다. 하지만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페이스가 떨어졌다. 9월24일 첫 홈런을 맞았고, 27일 1이닝 3실점을 했다. 방어율은 6.52로 치솟았다. 아직 직구 스피드도 떨어지고, 변화구의 구질도 떨어진 탓이다. 그는 인터뷰를 했던 24일 “아직 타자들의 눈에 내 공이 익숙하지 않다”며 “타자들에게 볼이 보이기 시작하면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날 홈런을 맞았다. 그래도 그가 쉽게 좌절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옛날에는 이랬는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중간계투라는 보직에도 감사할 따름이다. 내년 시즌에 몇승을 하고 싶다는 목표도 없다. 그저 “축구로 치면 어시스트하는 선수처럼 내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당장 야구를 못하게 되더라도 여한은 없다”며 “야구를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둔 것이 아니었고, 다시 선수생활을 해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참, 조성민은 박찬호, 임선동과 더불어서 92학번 3인방이었다. 대학은 다르지만 92학번 동기생으로 앞날이 유망한 투수 3인방이었다. 박찬호는 미국, 조성민은 일본, 임선동은 한국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오늘은 다르다. 박찬호가 부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다 제 복이지요”라고 답했다. 조금 뜸을 들인 뒤 “부럽지는 않지만 찬호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인간 조성민은 모르겠지만, 선수 조성민은 불행했다면 불행했다. 그리고 그는 먼 길을 돌아 다시 마운드에 섰다. 그의 바람은 하나다. 그는 “트러블 메이커 조성민이 아니라 야구선수 조성민으로 남기를 바란다”며 “진정한 선수로 진짜 은퇴를 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우선 포스트 시즌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돌아온 조성민의 과제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