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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찾사, 머물 수 없는 그리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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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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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 기념 콘서트를 기점으로 다시 돌아온 민중가요의 그때 그 가수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정직하고 소박한 목소리로 7년 만에 기지개를 켜다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1984년 1집을 내고 1998년 활동을 멈출 때까지 한국 대중문화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노래모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 10월8일 서울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리는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기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일간지들이 앞다퉈 연습실 풍경을 정겹게 전하고, ‘팬이라고 말하기에 쑥스러운’ 30, 40대 동지들이 그리운 이름을 반긴다. 그러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류의 서정가요들마저 광고 배경음악이나 힙합·댄스 가수들의 리메이크 소재로 활용되면서 ‘원본’의 현장성을 잃어가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굳이 되새김질하지 않더라도 왜 새삼스럽게 민주화 운동의 아름다운 상징물이 추억의 장식장에서 다시 걸어나오려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과거의 영광이 오늘의 인기로 부활하기란 장르를 막론하고 어려운 상황이다. 세대와 지역을 초월해 인기를 누렸던 소방차, 박남정이 컴백을 시도했지만 경과는 미지근하다. 텔레비전을 지렛대 삼아 돌아온 7080 그룹사운드들이 신곡으로 떴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잊혀진 노찾사의 90년대를 돌이켜볼 때 그들의 부활을 속단하긴 쉽지 않다.

"따뜻한 노래" "일상에 대한 성찰이 담긴 노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다시 기지개를 편다. 일상을 보듬는 새 노래로 대중과 호흡할 계획이다.


순발력 있게 만든 히트상품 2집

그들은 원래 예민한 사람들이었다. 시대적 감수성을 빨리 포착해내는 순발력이 있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여파로 사회의 공기가 훈훈해진 걸 감지한 그들은 그해 10월 서울 종로5가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제1회 공연을 열고 큰 반향을 얻는다. 여세를 몰아 내놓은 2집(1989)은 그해의 히트상품이었다. 민중가요가 대중가요권에 진출한 원년이었다. 거리에서 학생·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고작 애국가, <아침이슬> <선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들은 “노래운동은 폐쇄회로 속에 갇혀 있다”고 진단하고 좀더 대중적인 곡들을 골라 2집에 수록한다. 원래 <사계>도 기존 노래 운동계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곡이었다. 이런 영리한 기획 덕분에 <사계> <광야에서> <솔아솔아…>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됐고, 그들의 보편적 미학은 인정받았다. 구성원은 끊임없이 교체됐지만 ‘노찾사다움’은 지속됐다. 노래운동의 섬세한 결은 김창남(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영미(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1984년부터 발간한 부정기 간행물 <노래>(1~5)에 잘 드러난다.

네장의 앨범에는 민중가요 진영의 성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 2, 3, 4집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창작 동력이 고갈되기 시작한다. 운동 후일담 정서는 대중에게 모호하게 다가섰다. 노래평론가 이영미씨는 <서태지와 꽃다지>(한울, 1995)에서 1994년 노찾사 4집에 대해 “경제적이지 못한 애매한 시어와 관념적 한정어가 뒤범벅된 부자연스러운 가사 어법의 구사와 그조차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악곡 때문에 작품의 인상이 명료해지지 않고 가끔 몇몇 단어만 툭툭 들리는 현상 등의 문제가 다소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1987년 뒤 노동자 중심 운동이 부상하면서 꽃다지 등 전문 노래패가 등장하고, 문민정부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범은 댄스·록·힙합 등 새 장르를 쏟아내며 시장을 키워갔다. 굳이 안치환을 언급하지 않아도 민중가요 내부에서 잇달아 나온 개인 음반들이 공동체적 가치가 다원화를 중시하는 개인주의로 변환됐음을 말해줬다. 그리고 10년. 386세대의 정치적 부상과 상관없이 온라인 매체와 음향 장비의 발달, 가요 수용층의 분화와 붕괴가 가져온 음악 환경의 변화는 노찾사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9월24일 서울 상도동 연습실에서 만난 노찾사 대표 한동헌씨는 “부정과 불의에 분노를 표출했던 노찾사의 역할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1집 수록곡 <바람씽씽> <그루터기>의 작곡가로 현재 알레스 뮤직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슬한 경계를 달리며 일궈낸 심미성들이 대중음악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해 아쉽다”며 그는 1960, 7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누에바 칸시온’을 언급한다.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 노래운동은 식민지와 독재정권을 경험한 라틴아메리카 대중들에게 자주적이고 고유한 문화 경험을 안겨주면서 세계 음악사에 넓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 “요즘 한국 대중문화에선 방향성을 발견할 수 없다. 삶과 노래의 괴리가 커져가고 있다”고 고민하던 한 대표는 2001년 ‘그때 그 사람들’에게 재결합을 제안한다. 2004년엔 2·3집을 묶어 음반을 재발매했고, 관련 서적도 마무리돼간다. 이젠 노찾사가 다시 사람들을 만나 노래 부를 일만 남았다. 10월8일 옛 친구 권진원, 윤선애, 임정현과 함께 다시 무대에 선다.

“비장한 가사들 쑥스럽지만 기뻐요”

가창 연출을 맡은 신지아(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강사)씨는 “비장한 가사를 다시 부르려니 쑥스럽고 부끄럽지만 기쁨이 그걸 상쇄하고 남는다”고 말한다. “콘서트가 쫄딱 망하면 그냥 끝”이라며 “공연에 오지 않으면 안 돼요”라고 거듭 강조한다. 독집 음반을 내고 전업가수로 활동하는 문진오씨는 “핏발 선 소리들이 부드러워졌다. 무조건 정직하려고만 했던 그때보다 세상에 대한 관점도 넓어졌다”고 다시 모인 소감을 밝힌다. 전업주부, 번역가, 음악교사로 생활 전선에서 삶을 숙성시켜온 이들은 노래를 잊을 수 없었다. 노찾사의 활동을 바탕으로 설립된 ‘다음기획’은 지금도 권진원과 윤도현밴드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고, 일군의 이론가, 작곡가들은 학계에 정착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 민주화의 봄, 1970년 유신정권의 학원가 탄압과 금지곡 조치들, 그 이전의 저항적인 기독교 서클과 청년문화에까지 닿기에 노찾사의 이름에서 과거의 무게를 덜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과거’의 자산은 ‘오늘’을 돌파할 수 있는 탈출구를 보여줄 수 있다.

1991년 학전소극장 장기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열중한 멤버들. 소중한 과거는 '오늘'의 그들에게 힘이 된다. (사진/ 한겨레 변재성 기자)

한동헌 대표는 “젊은 창작자와 문화기획자를 발굴할 수 토양을 만들고 싶다”며 “노찾사를 일종의 기관(Institution)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구상을 밝힌다. ‘다시 하는 기쁨’을 표정으로 보여주는 최문정씨는 “아이들과 부를 수 있는 노래, 따뜻한 노래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일상을 깊이 있게 다루고 싶다.” “소외된 이들을 위한 노래.” “좋은 문학과 시를 찾아내고 싶다.” “삶이 어려울 때 문화적 풍요로움이 더 간절해진다.” “지적 성찰이 있는 음악.” 제각기 다양한 바람들을 가지고 있다. 당장 장기 활동에 나설 이도 분명히 정해지지 않았고, 신곡도 권진원씨가 부를 한곡뿐이지만, 미래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불안감이 정직하고 소박한 목소리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공연을 통해 신곡을 모으는 대로 5집을 낼 계획이다.

“머물 수 없는 그리움으로…” <동지를 위하여> 불렀던 아름다운 노랫말, <도대체 사람들은>(김민기 작사·작곡)이 지닌 송곳 같은 경쾌함 모두 공연장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노찾사의 미덕인 가곡의 정서도 <바다여, 바다여> <사랑노래>에서 확인될 것이다. 야광봉, 손수건, 맨주먹. 공연장에 무얼 들고 가야 하는지는 일단 공연장으로 출발한 뒤 고민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매끄럽게 단장한 새 홈페이지(http://www.nochatsa.org)의 텅 빈 게시판이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문의 02-3141-4751·4인 이상 단체 및 지방 거주자 할인, 과거 입장권 지참자 무료, 탁아방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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