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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화에 ‘연령제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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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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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의 질적 수준 높아지고 어른들의 독서모임도 활발… 인간 본연의 도리를 배워보라

사진/동화 읽기가 취미인 백홍숙(오른쪽)씨가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어린이 전문서점에서 동화책을 고르고 있다.(박승화 기자)
퇴근 뒤 집에 들어오면 누구나 나른함에 빠져든다. 바쁘게 놀리던 몸을 편하게 누이고, 요즘같이 추운 겨울이라면 이불 속에 들어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몸을 녹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 아닐까. 학원강사 이향숙(45)씨에게는 이 행복한 순간에 또다른 중요한 즐거움이 추가된다. 바로 책장에 꽂아놓은 동화책 한권을 펼쳐들고 아기자기한 그림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재미다.

동화 속에 시대를 초월하는 시각이

이씨의 집은 책이 가득하다. 줄잡아 1천여권의 책들이 집안 여기저기에 쌓여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400여권은 동화책이다. 80년대 인기동화인 권정생씨의 <몽실언니>와 독일동화 <모모>부터 지난해 연말에 나온 ‘최신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까지 다양한 동화책들이 따로 분류돼 있다. 집에 돌아온 이씨가 동화책을 꺼내드는 이유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어른이 동화를 읽는다면 대개 자녀들에게 읽어주기 위해서겠지만, 이씨는 자신이 읽기 위해 동화책을 편다. 이씨는 미혼이고, 책을 읽어줄 자녀가 있을 턱이 없다. 동화가 좋고 동화를 읽는 게 좋아 이씨는 10년 전부터 틈틈이 책을 사서 모아왔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에 회원으로 가입해 일주일에 네다섯권씩 동화를 읽는 ‘동화마니아’다.


“처음에는 ‘어른인 내가 이렇게 동화만 읽으면 혹시 수준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동화 속에 어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고, 어른들은 잊고 살았던 시대를 초월하는 시각이 들어 있다는 걸 늘 느껴요. 어른들이 읽는 소설이 우리 삶을 심도있게 표현한다면 동화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다룬다고 할까요. 어른책이 갖고 있지 못하는 매력 때문에 동화를 계속 읽게 됩니다.”

흔히 동화를 ‘어린이들만 읽는 책’으로 여긴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동화를 읽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이들에게 동화는 아이 어른 상관없이 누구나 읽어야 하는 마음의 양식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용과 형식이 다양해진 요즘 동화는 불과 10여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양적으로 엄청나게 바뀌었다. 어른들이 보기에도 정교하고 꼼꼼한 그림책부터 판타지동화까지, 그리고 그림동화나 이솝우화, 전통동화 일색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대의 국내외 동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자녀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동화책을 읽던 어른들도 자연스럽게 동화의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예 자녀가 없는 미혼 성인들 가운데서도 동화를 직접 구입해 읽는 동화애호가들이 차차 늘어나고 있다. 서울 양천구의 한 어린이책 전문서점 주인은 “요즘에는 먼저 자신이 읽고나서 좋았던 동화책을 친지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한권 더 사러 오는 손님들도 있다”며 “동화책은 물론 요즘 그림책들이 질적으로 워낙 좋아져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아지면서 그림책을 모으는 성인 독자들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처럼 동화 읽는 어른들이 늘어나는 데는 90년대 중반 이후 부쩍 늘어난 자녀독서지도모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린이독서연구회 산하 ‘동화 읽는 어른’이란 독서모임이 늘어나면서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읽고 공부하던 부모들이 자녀교육 목적을 떠나 동화 읽기에 취미를 붙이는 경우가 이런 동화마니아 어른들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동화 읽는 어른’ 모임에는 초등학생 자녀들을 둔 부모들만이 아니라 자녀들이 동화와는 거리가 먼 40대 이상 주부들도 상당하고 60대 이상 회원도 드물지 않을 정도다.

90년대 이후 강화되는 추세

사진/대만 작가 지미의 <미소짓는 물고기>. 삶에 대한 철학적 접근으로 어른들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현재 전국 ‘동화 읽는 어른 모임’ 회원은 약 3천여명. 이 모임은 매주 동화 한권씩을 읽고 한 차례 모여 토론한다. 회원들로서는 상당한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고 기본적으로 어른 스스로 동화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참가하기 어렵지만, 회원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연령층도 점점 다양해지는 추세다. 미혼 회원도 점차 많아지고 있고, 강원도 삼척에는 동화 읽는 할머니들의 소모임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일산에 사는 주부 배홍숙(39)씨도 처음에는 자녀교육을 위해 동화를 접했다가 이제는 아이들보다 자신이 더 동화에 빠져든 경우다. 애초 일산지역 주부들과 함께 동화 읽기 모둠을 결성했다가 동화에 대해 의문이 생겨 공부를 시작했고, 이제는 “동화책과 어린이책이 우스워보여도 그 속에서 얻는 ‘철학적 기쁨’은 다른 어른 책들 못지않다”고 예찬하는 동화애호가가 됐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동화만도 1500여권. 배씨는 “어른들을 위한 소설들이라고 해도 한번 읽고나면 끝나버리는 순간적인 재미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동화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재미를 발견할 수 있어 여러 번 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동화의 묘미를 설명한다.

물론 이들처럼 동화책을 읽는 성인은 아직은 매우 적다. 그러나 최근 전세계를 휩쓸며 우리나라에서도 성인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해리 포터의 모험> 시리즈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화가 가지는 힘은 어린이 못지않게 어른들에게도 매력적이다. 이제는 고전동화의 반열에 오른 <몽실언니>처럼 어른들이 열광해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동화는 꾸준이 있어왔다. 8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는 셸 실버스타인의 책들이 좋은 예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들어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은 요즘 세계 출판계의 흐름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최근 세계 출판계는 주소비자, 즉 독자 타깃을 10대로 맞추고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요즘 세계 출판계는 10대들의 정서와 눈높이에 맞춰 가족이 함께 읽고 정서를 공유하는 책을 내는 것을 마케팅 핵심전략으로 삼고 있다”며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동화를 읽는 어른층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두텁고, 원래부터 동화에 대한 인식도 달라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는 책이란 인식이 이미 오래 전에 정착됐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에메의 동화 <웅크린 고양이>의 경우 어른들에게 더욱 인기가 좋아 나중에는 아예 성인판이 따로 나오기도 했고, 야쿠자의 정부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삶을 진솔하게 고백해 지난해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의 경우도 동화처럼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이었지만 성인 독자들이 더욱 열광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부터 ‘성인을 위한 동화’라는 부제를 단 우화풍의 어른용 동화들이 꾸준히 선보이고 있고, 이 가운데 안도현씨의 <연어>와 <관계> 등이 수십만부씩 팔리기도 했다.

아예 성인판이 따로 나오기도

미혼으로 80년대부터 동화를 읽어오다가 어린이도서연구회 창립에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이 협회 조월례 이사는 동화야말로 어른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고, 앞으로 더욱 많은 어른들이 동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지고 인정이 각박해진 요즘 같은 시절에 진정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책이 바로 동화”라며 “동화가 어른들을 잡아끄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잘라 말한다.

“어른들은 세상의 부도덕한 것들도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부정과 쉽게 타협하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동화는 이런 세태에 대해 ‘그건 아니다’라고 분명한 원칙을 제시한다. 어른들이 살아가며 잊게 마련인 인간 본연의 도리를 재미와 함께 전해주기 때문에 동화는 성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정화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동화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만 읽는 책이 아니라 글자를 처음 배운 어린이부터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인 노인까지 누구나 읽는 책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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