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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 낭자들은 왜 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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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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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개발모델 연상시키는 아버지와 딸들의 가부장 시나리오
핵가족 스타일로 변주된 여자 골프에서도 강훈련의 신화는 계속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언제나 궁금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 “한국 여자 스포츠는 왜 강할까?” 어쩌면 정답이 없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모르겠다. 종목마다 사정이 다르고, 선수마다 이유가 다를 것이다.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있을 거야’. 뭔가 이유를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여성은 군대도 안 가는데, 낭자군의 힘은 왜 이렇게 세냐고.

승승장구 축구, 명감독은 아버지였다


세이프웨이클래식에서 첫승을 따낸 강수연. 그의 우승소감도 "부모님이 보고싶다" 였다. (사진/ AP)

한국 여자 스포츠의 승승장구는 끝이 없다. 세월이 흘러도 종목을 바꿔가면서 자긍심을 높여준다. 먼저 여자 탁구는 1973년 사라예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해 한민족의 한을 풀어주었고, 여자 배구는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을 땄다. 질세라 여자 농구도 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그리고 80년대 후반과 90년대는 여자 핸드볼과 여자 하키의 시대였다. 여자 핸드볼은 88년과 92년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96년과 2004년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여자 하키는 88년, 96년 은메달을 땄다. 여자 양궁, 여자 태권도, 여자 유도, 여자 배드민턴…. 끝이 없다. 그냥 단체종목 중심으로 가자.

한국 여자 축구의 승승장구는 여전히 개발모델이 유효함을 보여준다. 얼마 전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 축구가 우승을 했다. 북한을 이기고, 중국을 꺾고, 일본과 비겼다. 놀라운 성장세다. 중국은 한때 세계를 호령한 팀이다. 뜻밖의 우승을 차지하자 우승의 숨은 주역으로 감독이 떠올랐다. ‘여자 축구의 히딩크’라는 별명을 가진 안종관 감독이다. 언제나 여자 대표팀의 성공 뒤에는 선수들과 동고동락해온 남자 감독이 있기 마련이다. 안 감독도 오랫동안 대표팀을 맡아 마침내 한국팀을 강팀으로 만들었다. 명감독과 함께 명선수가 등장한다. 명감독이 조련한 ‘골든 제너레이션’이다. 한국 여자 축구의 골든 제너레이션은 박은선(19), 박은정(19), 한송이(20) 등 2004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한 선수들이다. 이들은 동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축이 됐다. 알고 보면 선수들은 불우하다. 여자대표팀 선수들 중 다수가 어려운 가정 출신이라는 소식이 따라붙는다. 아버지 같은 명감독에 잘 따르는 여자 선수들이라는 ‘가부장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유사 가부장에 유사 부녀 관계다. 한국 산업화의 눈물겨운 발전모델과 유사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자 월드컵 개최라는 장밋빛 미래가 제시된다. 국민적 관심의 온기가 선수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한다(불행히도 국가주의 스포츠가 저물면서 ‘국가적 열기’를 쏟아부을 수 있는 종목은 축구 정도밖에 없다). 이제 여자 축구의 앞날은 화창한 봄날이다. 그래서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아무리 개발모델을 반복해도 그들의 성공시대가 좋다. 그들의 드라마에 기꺼이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한국에서 스포츠팬이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돌이켜보면, 개발주의 발전모델은 여자 핸드볼, 여자 하키에서도 반복됐다. 발전모델은 여자 종목에서 유효하다. 여자의 경우, 아무래도 세계의 벽이 남자에 견줘 높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훈련만으로 넘기 힘든 벽이 있다. 체격의 차이가 크고, 기술의 토대가 취약하다. 하지만 여성 스포츠라면, 더구나 비인기 종목이라면, 스파르타식 훈련만으로도 세계 정상을 넘볼 여지가 있다. 물론 피땀 어린 훈련이 필요하다. 한국 여성들은 그것을 해낸다. 위대하다. 여자 핸드볼팀이 가장 빠르게 넘었다던 태릉 선수촌의 눈물 고개, 불암산 깔딱고개는 눈물겨운 강훈련의 상징이었다. 개발모델은 개발시대가 끝나도 유효하다. 일단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일정 수준에 오르면 그 종목은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가는 마차가 된다. 여자 핸드볼의 끝없는 메달 행진이 관성의 법칙을 증명한다. 이렇게 한번 정상에 오른 수준은 선수가 바뀌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개발시대가 끝나면 가부장 모델이 위협당한다. 한국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명장들은 수출되기도 한다. 90년대 한국 여자 하키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김창백 감독은 2000년대 중국 여자 하키팀을 세계 정상권으로 만들었다.

성공한 여자팀의 뒤에는 아버지 같은 감독이 있다. 동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뻐하는 한국 여자 축구 대표팀. (사진/ 연합)

여자골프의 다양한 성공모델

21세기 여자 골프는 한국 스포츠의 꽃으로 떠올랐다.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대회를 방불케 한다. 지난 8월 중순 세이프웨이클래식에서 강수연이 우승을 차지하는 등 1위부터 5위까지 한국 ‘낭자군’이 휩쓸었다. 올 시즌만 한국 선수들은 LPGA 대회에서 5승을 거두었다. 5승의 주인공도 모두 다르다. 새로운 우승자가 탄생할 때마다 가족 드라마가 연출된다. 특히 아버지의 뒷바라지 이야기가 눈물겹다. 장정처럼 아예 부모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뒷바라지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박세리 신화는 여자 골프 선수들의 모델이 됐다. 여자 골프는 개발주의 스포츠 모델을 대신하는 핵가족 시대의 가족 스포츠로 떠올랐다. 이제 선수를 보살피는 존재가 국가에서 가족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여성들은 가업의 주인공 역할을 짊어지게 됐다. 가족 사업의 모델도 다양하다. 일찍부터 골프 유학을 보낸 박지은의 중산층 모델부터, 아버지가 직업까지 제쳐두고 딸을 위해 헌신한 박세리 모델,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자수성가한 김주연 모델까지 다양한 성공모델이 탄생했다. 가족 배경은 달라도, 연습을 거듭하는 강훈련 방식은 유지된다. 하지만 성공의 한계도 있다. LPGA의 전설 줄리 잉스터는 박세리에게 “골프를 즐겨라” “다른 취미를 가져라”고 충고했다. 어쩌면 박세리의 슬럼프는 한국적 방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한국 낭자들은 한계를 극복하리라고.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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