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멀티플렉스에 밀려 관객점유율 추락… 맹위 떨치던 종로 빅3의 시대는 가버렸나
영화계의 오랜 불문율 가운데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을 뚫지 못하면 망한다’는 흥행공식이 있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도 세 극장 가운데 한곳에 걸리지 않으면 대박을 터뜨릴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제 영화인들은 수첩에서 이 공식을 지워야 할 것 같다. 명실상부했던 영화의 거리 종로가 그 간판을 떼어야 할 때가 왔다.
1999년만 해도 50%에 육박하던 종로, 중구 지역 극장의 관객점유율이 2000년에 20%대로 뚝 떨어졌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관객설문조사에 따르면 종로, 중구 지역 극장의 관객점유율은 28.4%로 99년 47.2%에서 현저한 감소를 보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지난해 서울지역에서 늘어난 스크린 수 51개 가운데 20개가 종로, 중구 지역에서 만들어졌음에도 관객점유율은 오히려 절반 가까이 낮아진 것이다. 반면 강남, 신촌, 강동, 강서 지역 극장의 관객점유율은 한결같이 눈에 띄는 증가율을 보였다.
상영시스템, 마케팅 능력에서 뒤져
종로 극장가의 침체는 단순히 숫자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한 시대의 마감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극장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단성사를 비롯해 오랜 전통의 세 극장이 삼각형을 그리고 서 있는 종로3가는 영화흥행의 척도이자 충무로와 함께 영화계의 양대산맥이었다. 80년대 말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 진출하면서 영화제작의 메카인 충무로가 해체된 뒤에도 종로3가의 조명은 꺼지지 않았다. 피카디리극장 앞에 새겨진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은 이곳이 바로 한국의 할리우드임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젊은 관객은 주말이면 이곳에서 북적이며 상영을 기다렸고 쟁쟁한 영화배우들이 이곳에 모여 스크린쿼터 사수 시위 등 한국영화의 중요 이슈를 펼쳤다. 앞서 말한 불문율도 굳게 지켜져 왔다. 98년, 같은 시기에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서울관객 68만명을 동원했지만 종로3가 진입에 실패했던 <유령>은 절반 정도인 36만명에 그쳤다. 그러나 지난해 종로3가 트로이카 가운데 두 극장인 피카디리와 단성사는 한국영화 최대의 흥행작인 <공동경비구역 JSA>와 또다른 대형흥행작 <글래디에이터>를 걸지 못했다. 이것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반세기가 넘는 종로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데는 무엇보다 광풍처럼 몰려온 멀티플렉스의 영향이 크다. 지난해 문을 열면서 멀티플렉스의 핵으로 떠오른 메가박스가 자리한 강남지역 극장의 관객점유율은 24.6%로 99년에 비해 7.6%포인트가 증가했다. 이는 종로, 중구 지역에 맞먹는 비율로 극장의 강남시대 개막을 예고하는 숫자다. 영화선택의 폭이 넓은 멀티플렉스는 관객뿐 아니라 배급사들도 좋아하는 시스템이다. 멀티플렉스의 경우 80석에서 300∼400석에 이르는 상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객몰이를 하는 개봉 초기에는 한 극장 안의 규모가 큰 두, 세관에서 병행상영을 하다가 기세가 꺾일 때쯤이면 소형관으로 옮기는 식으로 장기상영을 할 수 있지만 대규모 단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단성사의 이영웅 부장은 “블록버스터영화라도 일주일만 지나면 900석에 하루 200명이 채 들지 않기 때문에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어 배급사에서 좋아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009석의 규모를 가진 피카디리극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두 극장은 자구책으로 소형 상영관을 하나씩 운영하며 1관에서 내린 작품을 상영하고 있지만 멀티플렉스의 발빠른 움직임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다. 피카디리극장의 한 관계자는 “99년에 비해 관객이 30% 이상 빠져나갔다”며 “3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 영화들을 섭외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요즘엔 난항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단성사는 올 여름 복합관으로 전환 공사에 들어갈 계획이지만 사정이 더 어려운 피카디리쪽은 “복합관으로 가야겠지만 극장 운영이 적자에 가까운 상태라 아직 엄두도 못내는 상태”다.
이에 비해 멀티플렉스 등장에 기민하게 대응한 서울극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97년 7개관으로 확장한 서울극장은 3개 극장 가운데 유일하게 현상유지를 하고 있다. 또한 각종 이벤트와 사은품 행사 등 멀티플렉스들이 처음 시작한 공격적 마케팅을 도입했고 국내 최초로 디지털상영관을 만들면서 강남시대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서울극장의 권미정 이사는 “앞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좀더 적극적인 마케팅과 다양한 사은이벤트를 만들면서 종로의 유동인구를 유인하는 데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극장의 패권이 종로에서 강남으로 넘어오게 된 데는 쾌적한 시설과 선택의 다양성 못지않게 마케팅의 위력이 크게 작용했다. 멀티플렉스 이전까지 극장에는 “되는 영화를 건다” 외의 마케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 강남 삼성동의 메가박스는 ‘영화 한편에 선물 한 가지’라는 전략으로 지난해 문을 연 지 석달 만에 관객 100만명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직원 5명이 일하는 메가박스 마케팅팀의 황병국 차장은 “이제 영화만 가지고 관객을 유인하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수시로 관객조사를 해 데이터를 바탕으로 회원제를 만들어 관람료 적립포인트마다 상품을 제공하고 밤 10시 이후 관람객에게 무료로 콜라와 팝콘을 제공하는 등 끊임없는 이벤트 전략으로 주요 관객인 10대 후반∼20대 관객을 잡았다”고 성공요인을 설명했다.
배급사의 실패로 타격 가중
단관시대에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던 극장의 힘이 스크린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급사에로 넘어간 것도 지난해 종로 극장가를 우울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국내 최대 배급사이면서 종로 극장가에 우호적이었던 시네마서비스는 지난해 배급 작품 가운데 <비천무>를 제외한 영화들이 실패를 거듭했다. 시네마서비스의 직계배급라인인 서울극장 역시 이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공동경비구역 JSA> <글래디에이터> 등 초대형 흥행작들을 비롯해 <춤추는 대수사선> <헌티드 힐> <치킨 런> 등 중량급 흥행작을 선보이면서 다크호스로 떠오른 CJ엔터테인먼트는 관계회사인 CGV를 비롯해, 신설 멀티플렉스들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극장 주도권 싸움에서의 성패를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것은 요즘 관람료 인상을 놓고 벌어지는 풍경이다. 그 모양은 목소리가 커진 새파란 자식과 힘을 잃은 가부장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냉기 속의 팽팽한 긴장감처럼 느껴진다. 지난해 12월23일 메가박스와 CGV강변11이 7천원으로 관람료를 인상한 데 이어 강남지역의 신설 멀티플렉스들이 줄줄이 관람료를 올렸다. 그러나 이전 같으면 눈 하나 꿈적이는 것으로 전국 극장가를 바짝 긴장시켰던 종로 3개 극장은 이에 묵묵부답이다. 다만 옛정을 기억하는 종로와 중구의 극장가만이 이들의 행보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사진/극장의 멀티플렉스화는 종로시대의 마감을 가져온 가장 큰 요인이다. 97년 국내 최초로 문을 연 멀티플렉스 CGV강변11.(오계옥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