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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축구는 감독의 예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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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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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쳐도 선수한텐 안 들리고, 작전타임 없이 그라운드에 휩쓸리는 사람들
첼시의 모리뉴와 잉글랜드의 에릭손을 떠올리면 본프레레를 동정하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축구장의 감독은 무력해 보인다. 아무리 고함을 쳐도 선수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선수 교체도 고작 세번만 할 수 있다. 정윤수 축구평론가는 “축구감독은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휩쓸려가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축구감독에 견줘 야구, 농구 감독은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농구는 작전타임도 있고, 선수 교체도 무제한이다. 야구는 시시때때로 상황에 맞추어 작전을 ‘걸’ 수 있다. 경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투수를 교체할 수 있다. 그래서 야구감독에게는 “빨간 장갑의 ‘마술사’” 같은 표현을 쓴다. 하지만 축구감독에게 ‘마술사’라는 표현을 쓰기는 좀체 쉽지 않다. 과연 축구는 감독의 예술일까?

적절한 선수교체를 통한 ‘마술’


첼시의 모리뉴는 자신의 4-3-3 포메이션에 맞는 선수들을 데려와 자신의 팀을 완성했다.

경기장에서는 감독의 구실이 도드라지지만, 오히려 농구와 야구에서 선수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축구의 지단은 농구의 조든, 야구의 마르티네즈처럼 승패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축구는 의외성의 경기다. 그래서 축구는 재미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축구장의 감독은 무력해 보이지만, 축구감독의 영향력은 다른 종목보다 오히려 중요할 수 있다. 그러면 축구감독의 업무 과정을 보자. 일단 축구감독은 경기 전에 전술을 ‘완성’해야 한다. 전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포메이션을 짜야 한다. 포메이션이 작동하게 하려면 적합한 선수를 데려와야 한다. 젊은 명장, 첼시의 모리뉴 감독은 축구에서 감독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라니에리 감독 시절, 첼시는 구단주 아브라모비치의 첼시였다. 라니에리는 아브라모비치가 사주는 선수들로 포메이션을 짰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이적료를 퍼부었지만, 라니에리의 첼시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모리뉴 감독이 취임하면서 첼시는 모리뉴의 첼시로 바뀌었다. 모리뉴에게는 권력이 있었다. 2004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포르투갈 클럽 포르투를 우승으로 이끄는 이변을 연출해 아브라모비치가 모셔왔기 때문이다. 모리뉴는 클럽을 리빌딩했다. 자신의 포메이션을 짜고, 포메이션에 맞는 선수들을 데려왔다. 데려온 선수들의 이름값은 오히려 라니에리 시절보다 떨어졌다. 아브라모비치가 데려온 크레스포를 내보내고, 자신이 선호하는 드로그바를 데려왔다. 마켈렐레, 로벤 등 자신의 4-3-3 포메이션에 맞는 선수들을 스카우트했다. 그래서 같은 돈을 퍼붓고 다른 결과를 낳았다. 모리뉴의 첼시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제 선수 구성은 끝나고 경기가 시작됐다. 감독은 선수 교체를 통해 마술을 부려야 한다. 용병술이다. 겨우 세번의 선수 교체. 운신의 폭은 좁다. 한준희 문화방송 축구해설위원은 “축구감독은 선택의 기회가 적은 만큼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으로 옳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며 “그래서 감독의 용병술이 더욱 강조된다”고 말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퍼거슨 감독은 수십년 동안 자주 마술을 선보여왔다. 98~99 시즌 맨유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들어낸 두 골은 교체 선수의 발끝에서 터져나왔다. 이 시즌에 맨유는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리그, 잉글랜드 FA컵까지 3관왕(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한준희 위원은 “마술을 자주 부리면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평가했다. 2005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리버풀이 예상을 깨고 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베니테스 감독의 순간 순간마다 터진 선수 교체의 마술이었다. 같은 모험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히딩크 감독은 2002 월드컵 이탈리아 경기에서 공격수 5명을 투입하는 모험을 했다. 그 결과 설기현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역전골이 터졌다. 네덜란드의 반할 감독도 2002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인 아일랜드 전에서 클루이베르트, 하셀바잉크 등 5명의 공격수를 투입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골문을 열리지 않았고, 네덜란드는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것은 운일까, 실력일까?

클럽에 견줘 국가대표 감독은 운신의 폭이 좁다. 선수 선발도 제한돼 있고, 전술을 익힐 시간도 적다. 하지만 세계 축구의 흐름이 개인기보다 조직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감독의 구실은 중요해지고 있다. 조직력을 만들고 체력을 강화하는 일은 무엇보다 감독의 몫이다. 조직력은 개인기보다 단기간에 향상시킬 수 있고, 몇 경기만 치르는 토너먼트에서 특히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2002 월드컵의 한국, 유로 2004의 그리스 같은 이변의 팀들이 예전보다 자주 등장한다. 한국의 히딩크, 그리스의 레하겔 같은 ‘영웅 감독’이 태어난다. 전문가들은 축구감독의 역할을 교향악단 지휘자에 빗댄다. 지휘자가 없어도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고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연주일 뿐 음악이 아니다. 지휘자는 악보를 해석하고 세계를 창조하는 일을 한다.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지만 최고의 연주를 하는 것이다. 정윤수 평론가는 “축구감독의 역할도 그렇다”고 말했다. 과연 축구감독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한준희 해설위원은 “20위 팀을 1위로 만드는 마술을 부릴 수는 없지만, 5위 팀을 우승시키는 감독은 부지기수”라며 “감독의 비중이 50% 이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개숙인 본프레레, 2006년 월드컵에서 히딩크처럼 대역전극을 연출할 수 있을까? (사진/ 연합·한겨레 김봉규 기자)

왜 프랑스의 도메네슈는 아직도 있는 거야?

추신. 2002 월드컵이 끝나고 유로 2004를 보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감독은 여전히 에릭손이었다. 솔직히 ‘어… 안 바뀌었네’ 했다. 2002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성적은 ‘고작’ 8강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무의식은 그 선수로 그 성적을 거두었으면 당연히 바꿔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로 2004에서도 8강. 그런데도 에릭손은 건재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 여직원과 스캔들까지 있었는데도. 여전히 에릭손은 2006 독일월드컵 예선의 잉글랜드 감독이다. 참, 에릭손은 스웨덴 출신의 외국인 감독이다. 프랑스 대표팀은 2006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최악의 고전을 하고 있다. 현재 2승4무로 조 4위. 하지만 도메네슈 프랑스 감독이 경질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한 가지 더. 유럽이나 남미에서 국가대표 감독이 최고의 영예는 아니다. 유럽의 명장들에게 국가대표팀은 명문 클럽에 못 미치는 두 번째 선택이다. 현 유벤투스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는 예전에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생각해보라.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완성한 뒤 맡은 팀은 레알 마드리드도, 유벤투스도 아니고 ‘고작’ 에인트호벤이었다. 대표팀 감독 경력은 그들의 이력서에서 맨 윗줄이 아니다. 지금, 명장을 데려오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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