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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중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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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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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밥 먹자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계속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밥 먹기 싫어서다. 전화를 하면 주로 안 받고, 어쩌다 받아도 지금 통화하기 곤란하다는 말이 번번이 돌아온다면? 그건 전화 통화하기 싫다는 뜻이다. 맑고 푸른 세상을 위해서는 직설화법이 좋겠지만, 상대가 스토커로 돌변할 수도, 내 험담을 죽도록 하고 다닐 수도 있는데 뭘 믿고 타인에게 직설적 언어를 날리겠는가. 특히 남녀관계에서 말이다.

내 평생 들어본 가장 신사적인 멘트는 옛 남자친구가 해준 말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때 만났던 그와 몇년 전 안부전화를 한번 한 일이 있다. 서로의 상태를 슬쩍 확인했다. 그나 나나 파트너가 있었다. 그럼에도 본의 아니게 시기 질투가 일어나는 건 인지상정이고, 그걸 숨기는 건 신사 숙녀됨의 기본이다. 난 무심한 척하며 속보이는 질문을 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근데 그녀는 어때(복합적인 뜻임)?” 그때 그가 한 말. “너보다 안 예뻐.” 순간 사방에서 꽃비가 내리고 밤하늘에 축포가 터지는 듯했다.

난 크게 깨달았다. 헤어진 뒤에도 적절한 ‘이중언어’ 구사는 필요하구나. 그런들 입이 부르트리. 지난번 칼럼에서 소개했던 ‘자뻑남’ 같은 부류는 예외지만, 한때 가까웠던 사이라면 따뜻한 립서비스는 예의범절의 한 항목이다. 나도 보란 듯이 숙녀됨을 발휘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통 기회가 없었다. 뜬금없이 아무한테 전화해서 묻지도 않았는데 “안녕? 난 잘 지내. 근데 지금 내 남자 너보다 안 멋있어” 이런다면. 아마도 씻나락 까먹는 귀신 취급 받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상의 ‘이중언어’는 미덕일 수 있지만, 잠자리 ‘이중언어’는 악덕이라는 게 ㄱ양의 주장이다. ㄱ양은 첫날밤, 성심성의껏 올라탄 자세로 일을 치렀는데, 때문에 두고두고 ㄴ군에게 씹혔다. “너 선수지? 그치?”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분명치 않으나, 하여간 ㄱ양은 “알거 다 아는 여자”로 찍혔고 그 업보로 틈틈이 ㄴ군을 다독여야 했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라면서. ㄱ양이 과연 첫 경험자인 양 굴어야 했을까?

멀쩡한 성인 여자가 잠자리에서 첫 경험인 척하는 건 왜일까? 1. 진짜라서 2. 진짜는 아니라서 3. 진짜는 진짜 아니라서. ㄱ양은 대부분 3번이라고 본다. 또 2, 3번에 속하는 이들이 오히려 1번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크다고 주장한다. 1, 2, 3번 두루 거친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속는 건 ‘처녀 밝힘증’ 있는 남자들이다. ㄱ양은 알거 다 알면서 아닌 척하는 여자들에게 이런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얘들아, 첫날은 그럼 좋을 거 같지? 근데 일단 그렇게 시작하면 계속 ‘덜된 섹스’만 해야 해. 장사 하루이틀 하고 말 거니?”

죽기 전에 꼭 할 일이 있다. 내 납골묘에 “그 모든 남자는 스쳐지나간 바람이었네. 오직 한 사람, 그대만을 사랑했네”라고 써붙이도록 해놓는 거다. 물론 절대로 ‘오직 한 사람’의 실명을 밝혀선 안 된다. ‘그 모든 남자’들이 그게 자기라고 착각하든 아니라고 안도하든, 숙녀라면 이 정도의 매너는 지켜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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