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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펑크난 펑크, 남겨진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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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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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양아치의 패배’ 딱지가 붙은 카우치 알몸 사건에 자기 검열은 없었나
‘문화적 일탈’과 ‘사법적 비행’을 동일시하는 주류의 편견에 문화는 표류한다

▣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1970년대 영국 펑크문화의 이단아이자 청교도 부모 세대의 골칫거리였던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가 전미 순회 공연을 떠나기 위해 들렀던 히드로 공항에서 과의 인터뷰 도중 카메라에 침을 뱉고 가운데 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당시 아침 생방송에서 일어난 이 사건으로 영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고 섹스 피스톨스를 영구 추방하라는 부모 세대의 분노가 언론을 뒤덮었다. 섹스 피스톨스와 전속 계약을 맺었던 EMI사는 여론에 밀려 이들의 전미 순회 공연 도중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이들은 이후에 EMI사의 행태를 조롱하기 위해 인디레이블에서 발매된 자신의 데뷔 앨범 맨 마지막에 라는 노래를 수록하기도 했다). 섹스 피스톨스의 ‘방송사 습격 사건’을 기점으로 영국 펑크문화는 기성세대와 언론으로부터 이른바 ‘펑크 길들이기’라는 대대적인 정화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일례로 <데일리 미러>는 1977년에 일주일 동안 펑크 특집기사를 실었고, <여성자신>이란 저널은 ‘펑크와 어머니’라는 주제로 가출한 펑크소년이 강아지를 안고 어머니와 환하게 웃는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싣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음란한 블랙홀에 빠지다


문제의 문화방송 <음악캠프> 방송 장면.

30여년이 지나 한국의 한 방송사에서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아니 상황 자체를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성기노출 사건이 청소년들이 주로 시청하는 주말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벌어진 것이다. 과거 ‘삐삐롱스타킹’이 생방송 도중 카메라에 침을 뱉은 일은 있었지만, 조선 펑크가 전대미문의 성기노출 퍼포먼스를 감행하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한국적 문화환경에서는 어떤 명분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펑크밴드 ‘카우치’의 전라 퍼포먼스는 전국을 음란한 블랙홀에 빠지게 했다.

당초 우발적인 행동이라고 말했던 ‘카우치’ 멤버들은 경찰 조사에서 결국 장난 삼아 재미있게 해보려고 계획했다고 진술했다. 예상대로 이들은 공연음란죄로 구속되었고, 이들의 철없는 행동은 한낮의 해프닝으로 마감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개인의 음란한 행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펑크와 홍대 인디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텍스트다. 대부분 미디어는 펑크문화에 대한 충분한 해석을 동반하지 않고, 벌어진 결과만을 놓고 이들의 행동을 철없는 변태행위로 규정했다. 이들의 행동에 의도적인 불순함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단서 찾기에 혈안이 되었고, 이 변태행위가 약물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며 약물 검사에 촉각을 세우기도 했다.

사실 청소년을 주 시청자, 주 방청자로 하는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출연진이 성기를 노출하는 사건을 옹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똑같이 ‘변태’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음악캠프>가 올봄에 기획했던 ‘이 노래 어떤 가요’ 코너의 추천위원인 필자로서도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프로그램이 중단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번 일로 인디 음악계에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카우치 멤버들이 야속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들의 도발적 행동이 갖는 문화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싶어진 것은 이 사건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사건을 대하는 미디어와 대중, 그리고 행정 관료의 사후적인 반응에서 드러난 반문화적 태도 때문이다. 사실 주류 미디어뿐 아니라 대중의 절대 다수가 이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현실이다. ‘럭스’와 카우치의 이른바 ‘음란공연’은 이제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유다의 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은 문화적 맥락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너무나 일방적이다. 급기야 ‘펑크는 모두 한통속’이라는 신념하에 이명박 서울시장은 음란한 펑크밴드 색출하기 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한 멤버가 입은 ‘욱일승천기’ 티셔츠를 지적하며, 이들의 반민족성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한 보수 언론은 이번 사건을 시청률 지상주의가 몰고 온 인재로 몰고 가면서 사건의 정세를 예의 특정 방송사 죽이기용으로 활용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카우치' 멤버들은 얼굴을 가렸고 기자들은 집요하게 질문과 카메라 세례를 퍼부었다.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 출두한 카우치 멤버들. (사진/ 연합)

그들의 무의식, 흉칙한 괴물이 됐지만…

그렇다면 과연 럭스와 카우치 멤버들은 정말 반인륜적이고 정신 나간 짓을 한 것일까? 물론 이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더욱이 이들 말대로라면 성기노출은 주류 사회에 대한 저항이 아닌 그저 재미 삼아서 저지른 행동에 불과하니 말이다. 아니 섹스 피스톨스와 ‘클래시’(Clash)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유사 펑크주의자들에게 지상파 방송 출연이란 어울리지 않은 밥상이다. 그러나 재미 삼아 지상파 방송과 기성세대에 ‘한번 멋지게 물먹여 보이겠다’는 객기 안에는 오랫동안 잠재돼온 정치적 무의식이 스며들어 있다. 이들의 잠재 심리는 프로이트의 지적대로 마치 ‘억압된 것이 회귀’하듯이 응축과 대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흉측한 괴물의 형태로 표면 위로 폭발한 것이다. 그 행위는 폭발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정확히 한국적 기성 가부장제가 가장 금기시하는 ‘성기 중심주의’를 향했다. 카우치의 성기노출은 표면적으로는 탈정치적인 음란 행위지만, 정작 이들의 정치적 무의식이 기도한 심층의 공격 지점은 이른바 우리 사회의 주류라는 것들의 왜곡된 표상들이다. 나는 이들이 펑크의 저항의식을 겸비하지 않고, 한국 사회의 주류를 비난하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속칭 ‘생양아치’라 해도 이들 행위의 무의식 안에는 그러한 정서적 교감이 들어 있다고 보고 싶다. 또한 이들의 자발적 진술 이면에는 주류 사회의 과잉된 비난에 따른 자기 검열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홍대 앞 음악인 비상대책위는 "카우치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 사건이 홍대 앞 문화에 대한 매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사진/ 한겨레 양예나 인턴기자)

문제는 펑크에 대한, 혹은 일탈적인 비주류 문화에 대한 주류 사회의 일상적인 편견이다. 욱일승천기가 그려진 티셔츠에 대한 대중들의 비난 역시 펑크문화에 대한 문화적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펑크족들은 나치의 십자상인 ‘스와스티카’(swastika)를 가슴에 패용하고 다녔는데, 이는 펑크족들이 나치즘을 신봉해서가 아니라, 나치를 혐오하는 부르주아 기성 부모세대들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오늘에도 펑크문화의 ‘문화적 일탈’과 ‘사법적 비행’을 구별하지 않는 주류 기성사회, 더럽고 불결한 펑크족들의 행동을 모두 범죄행위로 단속하려는 공권력의 폭력적인 시선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진정한 책임은 분별 없는 철부지 행동을 한 럭스와 카우치에 있거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제작진에 있다기보다는 오랫동안 비주류 문화를 소외시켜온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을까?

더 펑크다운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예외적인 문화 해석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결국 펑크주의자들의 패배로 결론 나는 듯하다. 홍대 클럽들의 연대모임에서도 제작진과 시청자들에 대한 사죄와 재발 방지를 위한 자체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나섰고, 사건의 당사자인 카우치 멤버들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깊이 자숙한다는 사죄의 발언을 했다. 차라리 당당하게 자신들의 의도를 분명하게 말하고 이번 사건의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환기시키는 것이 더 펑크다운 행동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더 이상 억압하지 말라는 발언은 불가능했을까? 사건 당사자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펑크와 홍대 문화의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펑크의 방송사 습격 사건의 미스터리는 그 진실을 계속 탐문해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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