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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방송] 공주놀이, 어색하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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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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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환타지의 배우 김정은, 드라마 <루루공주>에서 재벌가 딸로 변신
화려한 드레스에 감겨 사라진 특유의 애드리브와 편안한 어수룩함

▣ 강명석/ 문화평론가

김정은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니, 성공신화의 표본이다. 10여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성장해 급기야 상대 남자 배우보다 더 강력한 흥행 파워를 가진 배우 김정은도 그렇지만, 그가 맡은 배역의 변천사는 말 그대로 ‘신분 상승’과 다름없다. <동의보감>의 저자를 ‘전광렬’로 알고 있던 다방 종업원(<불어라 봄바람>), 자신의 남자친구를 톱스타에게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던 평범한 여성(<내 남자의 로맨스>), 가족이 벌려놓은 채무에 고생하던 저소득자(<파리의 연인>) 등 그가 맡은 배역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그리 윤택하지 못했다. 그나마 좀 나은 게 <가문의 영광>에서 ‘서울대’ 출신에 목매는 조폭 집안의 딸이었다.

“평범한 내 여자친구같아" 전작들의 성공


그러니 SBS 드라마 스페셜 <루루공주>(매주 수·목 밤 9시55분)에서 한국 최고의 재벌 그룹 총수의 딸로 출연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신분상승을 이룬 셈이다. 그래서 <루루공주>의 김정은은 그의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김정은의 성공시대를 열어젖힌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는 그가 일종의 변형된 신데렐라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증명하듯, 그의 작품 속에서 상대역을 하는 남자는 늘 재산이나 학벌, 심지어 사귀는 여성도 김정은보다 낫고, 김정은은 늘 우여곡절 끝에 그 남자의 사랑을 쟁취했다. 물론 이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일반적인 흐름이지만, 그는 ‘알고 보면’ 예쁘고 똑똑하며, 남자의 일에 도움까지 줄 수 있는 준비된 신데렐라와는 달랐다. 그의 매력은 신데렐라이면서도 지극히 평범하고, 더불어 내숭 없는 어수룩함을 가졌다는 데 있다. 늘 실수 연발에,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순진한 표정, 그리고 <가문의 영광>이나 <불어라 봄바람>처럼 다른 신데렐라들과 달리 욕설이나 비속어를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대사 뒤에 한두 마디씩 붙는 코믹한 애드리브성 멘트들은 김정은을 남녀 모두에게 새로운 판타지로 자리잡게 했다.

<루루공주> <파리의 연인>

기존의 도도한 이미지를 지닌 여배우들과 달리, 어수룩한 이미지가 더해진 김정은은 평범한 여성들에게 신데렐라 스토리에 자신을 몰입시키도록 만들었다. 또 남성들에게 김정은은 ‘내 여자친구’에 대한 판타지를 만족시켰다. <파리의 연인>이나 <가문의 영광>에서, 김정은은 화려한 학벌과 재산을 가진 남자친구에 비해 사회적으로 열등할 뿐만 아니라,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자 지극히 순종적인 여성으로 변한다. 그래서 평범해 보이는 만큼 접근하기도 쉬워 보이고, 내 여자친구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예쁜데다 나에 대한 애정도 굉장하다. <가문의 영광>에서 피아노 연주와 함께 <나 항상 그대를>을 부르던 김정은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김정은이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불러서가 아니라 내 평범하던 여자친구가 어느 순간 갑자기 나를 위해서 예상 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줬다는 점이 크다.

그가 광고(CF)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부자 되세요” 같은 카피를 ‘스타’가 아니라 평범하고 귀여운 여성의 모습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쁜데도 평범한 척하는 여성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예쁘고 매력 있는 여성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루루공주>의 김정은은 어딘가 생소하다. 설정이나 출연진에서 <파리의 연인>이나 <가문의 영광>을 연상시키는 <루루공주>는 외양만 보면 김정은의 다른 어떤 출연작보다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성에 들어가길 염원하던 신데렐라가 갑자기 한국 최고 재벌 가문의 자식으로 나오는 것은 시청자들에겐 낯선 일이다. <루루공주>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자들과 무슨 대화를 해도 위트 있게 받아넘기던 김정은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공주님’은 대형 스크린이 있는 전용 AV룸에서 영화를 보고, 늘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따돌리려 노력한다. 그래서 <루루공주>의 김정은은 로맨틱 코미디에 ‘딱 좋아!’를 외칠 수 있었던 과거의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지 못한다. <파리의 연인>이나 <내 남자친구의 로맨스>에서 평범한 여성에서 갑자기 무도회나 패션쇼의 주인공으로 변신하며 숨겨진(?) 미모를 과시했던 김정은의 ‘평범한 예쁜 여자’의 매력은 재벌 2세의 화려한 드레스로 인해 사라져버렸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재벌 2세다 보니 과거처럼 내숭 떠는 척하다가 한두 마디 툭툭 던지는 김정은 특유의 애드리브도 없어졌다. 대신 편안함을 이끌어냈던 김정은의 어수룩함은 세상 물정 모르는 재벌의 순박함으로 포장됐고, 은근슬쩍 담겨 있던 남성에 대한 의존과 순종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왜 ‘떡볶이가 처음’인 여자로 변했을까

<루루공주>에서 김정은은 ‘아무것도 몰라요’의 표정으로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고, 경제적으로는 할아버지와 오빠 등에게 의지하며, 일상생활은 운전기사나 남자친구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며, 심지어 떡볶이를 처음 먹어본다는 ‘해괴망측’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루루공주>는 아무리 황당한 설정이라도 시청자와 어느 정도 현실적인 접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김정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정말 ‘다른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시청자들을 당황스럽게 할지, 아예 만화 같은 과장의 재미를 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왜 김정은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던 자신의 ‘평범한 아름다움’을 버리고 공주님의 길을 선택했을까. 이건 웬지 어학연수 다녀온 뒤 갑자기 달라진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김선아의 또 다른 입지전적인 성공기를 보면, 가뜩이나 요즘 사람들은 공주님보다는 성 밖에서 빵 굽는 방앗간집 셋째딸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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