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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천재아줌마, 전주원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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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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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10승만큼 흥미진진했던 아기엄마의 화려한 복귀
‘코트의 주인공’ 욕심 버리고 후배들 플레이 풀어주는 실타래 자임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이럴 팀이 아닌데, 어쩐지 잘한다 했다. 지난 6월, 2005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 예선에서 한국이 중국을 이겼다. 스포츠 기사의 제목으로 쓰자면, 중국에서 만리장성을 무너뜨렸다. 이건 사건이다. 한국 여자농구는 삼세번에 한번쯤 중국을 이기는 훌륭한 전통을 이어왔지만, 중국에서 중국을 이기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 나는 이런 뉴스가 박찬호의 10승만큼 흥미진진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중계를 안 해주니 경기는 못 보았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의문이 풀렸다. 전주원, 세 글자가 거기에 있었다. 전주원이 복귀했구나, 그제야 알았다. 비록 전주원이 풀타임 출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주원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와 동갑이니,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2005 ABC 예선서 중국을 격파하다


사실 나는 전주원의 팬이 아니었다. 국가대표 전주원을 응원한 적은 있어도 프로팀(혹은 실업팀)의 전주원을 응원한 적은 없다. 남들은 ‘여자 허재’라고 칭송해 마지않았지만, 나는 그저 ‘잘하네 뭐’ 시큰둥했다. 차라리 전주원의 라이벌인 김지윤의 플레이가 좋았다. 기계처럼 정확하게 찔러주는 패스를 ‘자주’ 구사하는 전주원보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허를 찌르는 패스를 ‘가끔’ 선보이는 김지윤의 플레이에 더 매료됐다. 이상민보다 강동희를 더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했다. 남들이 ‘미녀 가드’라고 치켜세우는 전주원이 나에게 ‘예뻐’ 보이는 순간은 중국을 이기거나 일본을 누를 때뿐이었다. 가끔은 전주원 없는 대표팀을 보고 싶기도 했다. 대표팀에서 김지윤은 전주원에 밀려 10년째 후보였다. 둘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을 가진 천재 포인트가드였다. 바람이 이루어졌다. 전주원이 2004년1월 ABC 대회 직후 은퇴했다. 임신을 해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여자농구팀에 전주원은 없었다. 전주원이 없는 국가대표는 처참했다. 한국 여자농구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전패의 수모를 당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의 기적 같은 4위의 추억은 기적같이 반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2005 ABC 대회에서 중국을 이겼다는 ‘뜻밖의’ 기사를 봤을 때 ‘이럴 팀이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이 대회 결승에서 중국과 재대결해서 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전주원의 복귀는 소속팀 선수들에게 투자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전주원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선수 한명 이상이다. (사진/ 연합/ 컴퓨터 그래픽 황선재)

전주원은 꼴찌팀도 선두로 올려놓았다. 전주원이 플레잉 코치로 뛰면서 소속팀 신한은행은 2004 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 꼴찌팀에서 2005 여름리그 선두로 뛰어올랐다(1라운드 종료시점. 전주원의 부상 등으로 신한은행은 2라운드 2연패를 당하며 7월29일 현재 5승3패, 3위로 내려앉았다). 전주원 효과였다. 전주원은 1라운드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 1라운드 5경기 평균 13.6득점, 8.8도움주기. 김지윤을 제치고 도움주기는 여전히 1위였다. 33살에 은퇴해서 출산 뒤 10개월 만에 돌아온 아줌마의 복귀로는 믿어지지 않는 성적이다. 내 스포츠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복귀였다. 마이클 조든의 복귀도 이토록 완벽하지는 못했다. 전주원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뒤늦게 전주원의 팬이 됐다. 한 가지 더. 은퇴 뒤 복귀해서 국가대표 하는 선수는 정말 드물다. ‘돈’은 안 되고, 힘만 드니까. 대표팀까지 마다하지 않다니, 진정한 스포츠맨의 향기가 풍겼다. 전주원이 정말 궁금했다.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 운동하든 마찬가지인데, (대표팀에) 불러주니까 고마울 따름이죠 뭐.” 우문에 현답. 베이징 올림픽까지 뛰라고 부탁했다. “욕을 하세요, 욕을. 앞으로 길어봤자 딱 2년이지 않겠어요?” 김지윤을 만년 후보로 만들었다고 타박했다. “아니에요. 이제 저는 국가대표에서 후보예요. 지윤이는 제가 잘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요.”

가족도 말린 복귀 “즐기니까 재밌어요"

가족도 복귀를 말렸단다. 할 만큼 했으니까. 많게는 하루 8시간씩 훈련하는데, 서른넷의 아줌마는 지치지도 않나 보다. “경기를 즐기니까요. 농구가 재미있어요.” 역시 즐기는 놈을 못 당하는 법이다. 하긴, ‘노익장’이 그의 것만은 아니다. 여자팀의 간판은 죄다 30살이 넘은 노장들이다. 정선민, 김영옥, 박정은, 이종애 같은 90년대 농구대잔치 출신 선수들이 프로팀의 간판은 물론 대표팀까지 장기 집권하고 있다. ‘조로’ 전통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비결이 뭘까. “프로가 되면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니까요.” 전주원의 대답이다.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하죠. 예전에는 경기할 때는 웨이트를 안 했거든요. 요즘은 농구 반, 웨이트 반이에요.” 역시 문제는 체력. 힘이 받쳐주니까 농구도 오래 한다. 그래도 억지로 하면 오래 못하는 법. 분위기도 ‘프리’해졌냐고 물었다. “맞아요. 옛날에는 언니들 무서워서 운동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외국인 선수들도 이상해하지 않을 만큼 자율적이에요.” 뭔가 바뀌긴 바뀌었나 보다. 돌이켜보면, 농구천재 전주원의 선수인생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몸고생, 마음고생도 겪었다. 서른살 무렵에는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선수생명의 위기도 맞았다. “큰 부상을 당하고 나니까 승부에 덜 집착하게 됐어요.” 끈질긴 재활로 코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정신적인 시련. 2004년 소속팀 현대가 해체됐다. 다른 선수들이 구제금융 위기 때 겪은 일을 뒤늦게 당한 것. 그래도 농구에 염증을 내는 대신 선수로 돌아왔다. 그것이 전주원이다.

언니들의 전성시대가 오래가면, 동생들의 전성시대는 늦어진다. 후배들 앞길 막는 선배? “언니들이 스스로 비켜주는 건 말이 안 돼요. 후배들이 치고 올라와야죠.” 발끈하지는 않아도 수긍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선수층이 얇아져서 후배들이 없어요.” 여자농구 성인팀의 수가 줄어들면서 초·중·고팀의 저변도 얇아졌다. 세대교체가 늦어지는 또 다른 이유다. 그가 걱정한다. “핵가족 시대에 자식한테 운동시키려고 하지 않죠.” 그는 자신이 코트의 주인공이라는 욕심도 버렸다. 그저 후배들의 플레이를 풀어주는 실타래를 자임한다. “체력이 달리니까 요령으로 버티는 거죠.” 그의 목표? 자신의 자리를 좁혀서 후배들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은퇴하기 위해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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