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잘 지은 시인, 그러나…
등록 : 2001-01-03 00:00 수정 :
사진/2000년 12월26일 김한길 문화부 장관이 문화훈장을 추서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그는 시를 잘 지었다. 1915년 5월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서운리 질마재,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두루 따분하고 가난하고 서글픈 사람만이 모여서 산다”는 곳에서 그는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서당에 다녔고 1924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동한 혐의를 받아 퇴학처분을 당했다.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지만 다시 자퇴한다. 스무살 때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본격적으로 등단한 것은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서다. 이때부터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남한 내 순수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스물세살 때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썼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여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품에 안고 있는 이 시는 이후 그의 시세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 스물여섯에 첫 시집 <화사집>을 냈다.
그는 시를 잘 지었다. 한국말을 자기 뜻대로 부리는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우리말을 부리는 그의 재능은 1943년 최재서가 운영하던 친일 성향의 출판사 ‘인문사’에 들어가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의 편집일을 하며 제국주의 일본을 찬양하는 시와 종군기를 썼을 때에도 발휘되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으로 시작하여 유려한 수사법으로 가미카제를 찬양하는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伍長頌歌)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외에도 ‘보도행’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등의 수필을 그는 남겼다. 이에 대해 그는 담시집 <팔 할이 바람> 속에 있는 ‘종천순일파?’라는 시를 통해 ‘나는 친일파라기보다는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며 비난을 비껴갔다. 48년 그는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낸다. 악마적인 관능을 표현한 첫 시집과는 달리 이 시집에서 그는 동양적 정서를 드러낸다. 해방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전기 <이승만 박사전>을 썼던 그는 6·25를 겪으며 전쟁의 충격으로 언어상실과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 59년부터 동국대 부교수로 취임해 79년에 정년퇴임했다. 71년에 현대 시인협회 회장, 77년에 한국문인협회 회장직에 올라 대한민국에서 문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는 시를 잘 지었다. 1천여편에 달하는 시를 지어 자기만의 소우주를 만들었다. 젊어서만 쓴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서도 줄곧 썼다. 첫 시집 <화사집>으로부터 여든두살이 되는 97년 <80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시집 열다섯권을 펴냈다. 평론가 장석주씨는 특히 75년 발표한 <질마재 신화>를 가리켜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한 마을을 한국인의 신화가 살아숨쉬는 마을로 불멸화했다”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문단의 거목, 부족방언의 요술사 등으로 일컬어진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그에 대해 “이후에 훌륭한 한국시인이 많이 나오겠지만 토착언어를 이만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시인은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이런 작품활동의 와중에도 그는 81년에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TV연설에 나왔고 87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쓴다. 이 시에는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시를 잘 지었다. 그의 이름은 서정주, 호는 미당(未堂)이다. 2000년 12월24일, 향년 85살로 별세했다. 그를 기려 나라는 문화훈장을 내렸고 한국방송공사에서는 특집방송(12월28일 11시30분 방영)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를 외운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