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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당신의 ‘초월 미학’에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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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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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의 죽음에 머리숙이며, 그를 둘러싼 신화들을 깨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길 기대한다

사진/구모룡 문학평론가.
모든 죽음이 귀한 것은 모두에게 내재한 죽음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미당(未堂)의 죽음 또한 많은 이들의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다. 나 또한 그를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을 둘러싼 분위기에 편승하여 한 개인의 생애를 추상적 신화로 만드는 일에는 동의할 수 없다. 최근 그를 민족시인 혹은 국민시인으로 칭송하는 등, 심각한 왜곡 사태를 접하면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미학적 분리주의

사진/1995년 사당동 자택에서의 생전모습.(강재훈 기자)
사실 미당의 죽음으로 문학사의 한 세대가 마감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세대는 한마디로 고통의 세대이다. 식민 지배와 이데올로기 대립, 전쟁과 가난을 겪었으니 이들보다 더한 고통을 경험한 세대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 세대는 고통을 수용하고 해소하며 극복하는 방법의 문제에 항상 직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당에 대하여 말이 많은 것은 그가 고통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해소하였다는 데 있다. 그는 감각에 사로잡히거나 초월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의 질곡을 가볍게 처리해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이나 민중의 고통과 함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민족시인 혹은 국민시인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그의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려진 만큼 뛰어난 작품이 많지 않다. 너무 많은 시들이 매우 안이하게 씌어졌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특히 후기시들은 거의 시적 긴장을 상실하고 있다. 그의 생애만큼 시도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신화를 걷어내는 객관적인 평가가 절실하다. 세상의 고통을 가볍게 벗어나듯이 그는 시를 큰 고뇌없이 수월하게 써왔다. 이는 시를 “시인의 자기 형성 과정에서 무시로 탈피해 던지는 낡은 허물”이라 한 자신의 발설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이러한 글쓰기의 입장은 자주 구설의 대상이 되었던 그의 행적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미당의 문제는 비평의 문제이자 미학의 문제이다. 미당의 많은 작품 가운데 초기의 몇몇 성공작들은 미당 신화 형성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중기의 시들이 과장을 더하고 마침내 신화가 객관적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여기에 미학을 가치의 정점에 두는 분리주의가 개입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미학적 분리주의는 미학을 일상과 생활 그리고 사회와 정치로부터 떼어내는 불연속성을 하나의 표준좌표로 설정하여 미적 문제가 사회현실과 무연하거나 그에 종속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분리주의가 미학의 바벨탑을 만들고 신화를 만드는데 이것이 종종 해당 시인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분리주의 미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행적과 미학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미학과 사회적 행위를 상호 연관시켜 살피면 이들이 같은 맥락과 지평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당의 경우 초월 미학과 사회적 무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존한다.

확실히 미당은 제대로 대지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소외를 선택하면서 대지와 그에 속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그런데 자기 땅으로부터의 소외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미당 미학에 자리하고 있었다. 간혹 <자화상>(自畵像)을 들어 초기의 현실주의를 말하는 이가 없지 않으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스스로 ‘종’의 지위를 선택함으로써 그 시대와 현실을 회피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애비는 종이었다’와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는 구절이 병존하는데 이는 그의 현실주의가 극복을 지향하는 것이라기보다 수락을 함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 수락은 피신과 다름없다. 상황과의 대결에서 어떠한 비극도 만들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초기시에서 감각과 관능에의 집착은 이러한 피신의 한 방책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현실을 버리는 대신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몸을 택함으로써 식민의 제국이 아닌 감각의 제국에 안주할 수 있게 한다. 몸으로의 환원은 감각의 구체성으로 현실의 구체성을 대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무심의 필터로 걸러지는 현실

사진/1941년 발간된 미당의 첫 시집 <화사집>. 자료:시공사 제공.
현실의 문맥을 결여한 감각과 욕망은 도피에 가깝다. 그의 초기시가 보이는 리비도는 건강한 에너지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원시주의는 현실의 반대편을 지향하면서 현실을 용인하는 것인데 그 기저에 깊은 좌절과 자학의 그늘이 숨겨져 있어 자주 왜곡된 형태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원시주의가 파시즘의 욕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욕망의 의미는 그것의 지향과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 미당이 보인 욕망의 길은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에 있다. 몽환 상태에서 비대화된 리비도만 남은 세계인데 결코 생성적인 공간은 아니다.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가 보이는 세계는 영도(零度) 혹은 무와 다를 바 없다. 일체의 시간이 정지되는 순간에 몽환적 관능미의 정점이 형성된다. 이러한 정점은 현실의 구체적 연관을 공허 혹은 허무와 등치시킨다. 이처럼 미당 미학에는 처음부터 대지로부터의 소외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자기 땅에서 유배된 식민지 시인이 자기 땅과 무관한 미학의 지평을 추구함으로써 다시 한번 더 현실로부터 유배된다. 그런데 이러한 두겹의 유배는 결국 유배라는 현실을 무화하면서 궁극적으로 유배의 현실을 인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미당의 초기시가 미당 신화의 근원이 된 것은 그의 시가 보인 생명과 욕망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대부분 몸으로 환원된 그의 몽상을 식민지 현실에 대한 원초적 저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시의 욕망 시학은 저항이 아니라 도피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가장 구체적인 감각에 의존함으로써 현실의 구체를 대신하고 다른 한편 관능미의 극점을 추구함으로써 미학적 위계를 만들어 현실을 무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욕망 시학은 그 다음 이어지는 초월 미학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자가 보인 강렬한 몸짓이 너무 인상적인 나머지 후자에 비해 구체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학을 형성하는 의식구조에 있어 둘은 동일하다.

미당의 미학을 초월 미학이라 할 때 그의 시에 일상과 생활이 배제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에도 일상과 생활은 허다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일상과 생활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미당이 보는 세계는 무심의 필터에 의해 걸러진다. 달리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닮았다고 할 수 있을 무심의 시선은, 그러나 현실을 구체적인 관계의 세계로 인식하지 않는 태도와 상응한다. 구체적 삶과의 거리는 미당 시학에서 피할 수 없는 질곡처럼 보인다. 이 점은 본격적인 초월을 노래하는 시에 이르러 모든 현실이 순식간에 기화하는 아지랑이가 되는 심각한 국면으로 진전된다. 다시 말해서 미당에게 초월은 너무도 쉽게 다가온다. 그의 시에서 초월의 지평은 하나의 전제처럼 작동하므로 현실는 초월을 위해 존재하는 장식에 불과하다. 형이상학적 초월 앞에서 그 어떠한 구체도 퇴색된다. 그런데 이러한 초월 미학에 문제의 무책임 사상이 담겨 있다.

초월, 순간적 자유, 기만

%%990004% 형이상학적 초월이 전제된 의식구조에서 현실세계의 가치들이 품고 있는 위계는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미당에게 애국이나 친일, 사회주의나 민족주의는 초월 앞에서 그 변별력을 잃어버린다. 역사나 사회적 행위 또한 초월의 지평에서 모두 관용될 수 있는 것이다. 초월의 관점에서 대수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초월의 미학은 무책임의 사상과 동궤를 달린다. 미당은 개인적인 선택과 사회적 행위들의 결과에 따른 책임을 초월의 관점에서 자신에게 귀속하려 하지 않는다. 초월의 지평에서 친일이면 어떻고 애국이면 또 어떠한가. 하물며 한두번 권력을 칭송하였다고 하여 그게 무슨 대수라 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행위들의 의미는 가을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사라질 것이므로, 현실은 결코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것도 귀책 사유로부터 면제된다.

확실히 미당은 초월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한국시의 한 경지라고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초월이 무조건 찬양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주의만으로 초월의 무의미성을 드러낼 수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어떠한 초월인가에 있는 것.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당의 초월 미학은 결코 깊은 영성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가 초월 미학의 이름으로 모든 세속적 권력을 유지하였을 때 그것은 세속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못했다. 초월은 미당에게 순간적인 자유가 되었는지 모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모든 것이 기만이 되고 말았다.

나는 미당의 후기시가 시사에 던지는 의미는 크지 않다고 본다. 전기나 중기의 시도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었다고 보는데 이는 해방 뒤 한국 문단을 지배해온 분리주의적 미학 관습이 크게 개입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좀더 엄밀한 검증의 과정이 필요한 바 미당 문제가 근대시학 전체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후기시는 또한 왜 문제인가? 그것은 미당이 일찍부터 형성한 초월의 형이상학이 부여한 상징 권력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반복된 포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기시(傳記詩)의 경우 초월의 시점에서 사회와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고 있고 여행시는 예의 떠돎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미당에게서 미학은 죄의식이 결여된 원죄이다. 그러나 미당의 형이상학적 초월 미학은 고통을 감당하면서 죄의식과 씨름하는 이 땅의 많은 시인들에게 죄의식의 원천이 되었다. 더이상 초월이 무책임을 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을 포기한 어떠한 초월도 불가능하며 어떠한 미학도 그것만으로 해명되는 미학은 없다.

구모룡/ 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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