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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성의 손길로 길들인 미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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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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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레알 여성과학자상 받은 미생물들의 ‘어머니’ 이연희 교수
항생제내성규주은행· 유산균 개발 등 탁월한 연구성과 거둬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갑작스럽게 대학에서 미생물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게 30여년 전의 일이다. 지난달 ‘2005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진흥상’ 본상을 수상한 서울여대 생명공학부 이연희 교수(분자미생물)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공계 가풍’을 소중히 여기는 부친(이문득 서울대 명예교수)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었다.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 방향을 바꾼 뒤, ‘여성 과학자’로서 경쟁력이 있는 분야로 떠올린 게 미생물이었다. “생물에 관심이 많았다. 동물은 덩치가 커서 제어하기 힘들 것 같고, 현장답사 위주의 식물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미생물 세계는 섬세한 여성을 필요로 할 것 같았다.”

미생물은 지구 시스템을 경영하면서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서울여대 생명공학부 미생물연구소 연구원들이 항생제내성균주를 동정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미대를 포기하고 황홀한 미생물의 세계로

실제로 미생물학도가 되어 현미경으로 바라본 미생물의 세계는 황홀했다. 물 1cc에 1 μm(1/1000mm) 크기로 수억 마리씩 존재할 수 있는 세균. 그런 세균이 사람의 몸에 1kg씩 살고 있으며 지구 시스템을 소유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생존하는 게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원시 지구를 독차지했던 미생물이 끊임없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삶은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실험실에서 밤을 새워도 힘들지 않았다. 지금은 연구자로서뿐만 아니라 한국여성과학기술인총연합 과학기술정보위원장을 비롯해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이사 등으로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에 미생물에만 눈길을 줄 수도 없는 처지다.

아무리 미생물에 빠져도 ‘정복자’가 될 수는 없었다. 병원균의 공격을 방어하고 좋은 포도주를 만들도록 하는가 하면 생물학 무기로 쓰일 만큼 맹독성을 지닌 미생물. 이들은 실험실에서도 놀라운 속도로 개체 수를 늘려갔다. 문제는 유용한 미생물을 어떻게 찾아내 활용할 것인가였다. 그것이 이뤄져야만 미생물을 신약 개발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건강에 관여하는 미생물을 찾아내야 했다. 또한 항생제에 저항성을 지닌 내성 균주의 정체를 확인해 신약 개발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사람이 어렸을 때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면 미생물과 접촉하지 못하게 되고 면역계의 방어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미생물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올해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진흥상 본상을 수상한 서울여대 이연희 교수. 이 교수는 항생제 내성 연구의 국내 기반을 구축하면서 여성과학기술자의 단체 활동에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과연 인류의 미래는 미생물에 달려 있는 것일까. 적어도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미생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미생물이 개입하지 않는 게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염증이나 감염에 노출됐다가 항생제 내성으로 장애를 얻거나 생명을 잃기도 한다. 교통사고나 화재 등으로 부상을 당했을 때 오염 세균을 제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은 면역억제제의 부작용으로 세균 감염에 시달려도 대책을 세울 수 없다. 생물학 무기를 생각하면 더욱 끔찍하다. 만일 내성 탄저균에 감염된다면 항생제도 속수무책이다. 한번 내성 탄저균에 노출되면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누구든 항생제 내성 문제를 생각하면 먹을거리에 대해서도 안심할 수 없다. 농축산물에 항생제가 무더기로 쓰이고 있지만 규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자연에 존재하는 내성균주와 유전자가 인체에 유입돼 조직과 장기를 괴롭히기도 한다. 이런 항생제 내성에 관한 문제에 골몰하던 이 교수는 지난 1999년 ‘항생제내성균주은행’을 설립해 ‘은행장’을 맡고 있다. “미생물에 관한 연구는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연구자들이 미생물 자원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특수연구 소재은행을 설립했다. 한마디로 연구재료 보급기지 구실을 하는 셈이다.”

내성 균주 진단하는 DNA칩 개발

현재 서울여대에 자리잡은 항생제내성균주은행은 1만여종의 균주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영하 193도의 액체질소 탱크와 초저온 냉동고(영하 70도), 저온 냉동고(영하 20도) 등에 세 가지 형태로 보관돼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각각의 방법으로 1만종씩 보관하는 것이다. 요즘도 대학 미생물연구소의 연구원 10여명이 연일 항생제 내성 메커니즘을 파악해 동정·분류·보관하고 있다. 미생물 은행 금고를 빼곡히 채우려는 것이다. 오는 8월에는 항생제 내성균주·희귀미생물추출균주·식물바이러스균주·야생버섯·해양미세조류 등 5가지 미생물 관련 은행을 통합한 ‘미생물거점은행’이 들어설 예정이다.

항생제내성균주은행에는 1만여종의 균주가 3가지 형태로 보관돼 있다. 이연희 교수가 저온냉장고에 보관된 균주를 살펴보고 있다.

이렇듯 항생제 내성균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결실도 얻을 수 있었다. 지난 2001년에는 반코마이신과 페니실린 계열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균주를 검색·진단할 수 있는 DNA칩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내성균주 13종의 특정 염기서열에 결합하는 DNA 조각을 심은 이 칩을 이용하면 환자의 감염균에 적합한 항생제를 빠르게 선택할 수 있다. 기존 검색법으로 균주를 파악하려면 배양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보통 3일가량 걸린다. 이에 견줘 이 교수팀이 개발한 DNA칩은 8시간 안팎에 여러 균주를 동시에 검색하고 정확도도 높아 항생제 오남용을 효과적으로 막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고가인 탓에 시장 진입로가 열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 교수팀의 연구 성과가 실험실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제품에 미생물 연구 성과가 담겨 있다. 위염과 위궤양, 위암 등의 원인균으로 알려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증식을 억제하고, 위벽에 달라붙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위벽에 부착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성 유산균을 개발한 것이다. 특허등록을 마친 항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기능 유산균들은 요구르트·우유·음료·라면·김치·젓갈 등 다양한 제품에 적용되고 있다. 이 교수는 위염·위궤양의 원인균을 차단하는 유산균은 물론 각종 알레르기 질환에도 유산균을 처방받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사실 이 교수가 여성 과학자로서 연구 성과를 올리는 데는 난관이 많았다. 두살배기 딸을 데리고 유학생활을 시작해 박사과정 중간에 둘째를 낳았고 교수로 재직하며 셋째를 낳았다. 그러면서도 항생제 내성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고 신기능 유산균주를 개발하며 생물 분야 국제 표준화 등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모성에 기반한 사회적 책임감’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국내의 여성 과학자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기에 오로지 연구 성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16년째 재직하는 서울여대 ‘여성 ’제자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생물은 생물반응기에서 놀라운 속도로 개체수를 확대한다.

“여성과학자들이 대접받는 계기가 되기를”

“아직은 중간 과정의 연구 행로에 있을 뿐인데도 로레알 여성과학자상을 수여한 것은 확실한 성과를 내라는 뜻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여성 과학자들이 대접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이 교수는 수상의 의미를 밝혔다. 국내에서 여성 과학기술인 고용비율은 11% 남짓이다. 정부와 기업의 체계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 교수처럼 여성 과학자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이다. 여성으로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과학기술 분야는 수두룩하다.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는 여성 과학자들을 바라본다면 ‘자연과학은 남성의 몫’이라는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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