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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사랑은 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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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3 00:00 수정 : 2008-09-1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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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300호 <쨍한 사랑 노래>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사랑. 지겹다. 이 문제에 대해선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우리 시대엔 언어가 사랑을 질식시킨다. 사랑의 아픔, 상실, 환희, 판타지까지 사랑의 언어는 해질 만큼 해졌다. 지난 이야기들을 재탕삼탕하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그렇다면 누가 사랑의 진실을, 혹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까?

문학과지성사는 시인선 300호를 맞아 <쨍한 사랑 노래>(박혜경·이광호 엮음)를 펴냈다. 지난 시집에서 추려낸 연애시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300호라는 기념비적 시집이 왜 ‘사랑 타령’일까? 시집은 머리말에서 사랑은 근본적으로 ‘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연애시를 읽는 것은, 타인의 깊은 내면의 장면들 속에서 자기 생을 들여다보는 모험이다.” 어쩌면 가장 낡은 장르로 치부되는 시만이, 사랑을 새롭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랑의 시작은 우선, 자신과 상대를 파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것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망설임과 저항이 따른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나는 허리를 구부렸다.”(이수명, ‘나를 구부렸다’) 어떤 낯섦으로 나아가는 것은 힘들다. 차라리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황동규, ‘쨍한 사랑 노래’). 시인 황지우는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쓸쓸한’ 시집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뼈아픈 후회’)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닿을 수 없는 영원함, 이룰 수 없는 합일을 향해 뛰어든다. 바닥까지 간다. “그를 갈 수 있는 만큼의 끝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랑이다… 그녀는 대기중으로 그녀의 전부를 흩어놓고 싶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껍데기의 공허를 맛보고 싶다/ 사랑이 그녀를 밑바닥에 이르게 한다.”(이선영, ‘사랑하는 두 사람’)

그리고 부재가 찾아온다. 사랑은 부재 속에서 가장 절실하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사랑노래들이 대부분 이별의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사랑의 상실은 자신과 타자에 대한 또 하나의 성찰이다.

“네가 황급히 떠난 자리, 두려워라/ 되짚어와 매만져볼 수조차 없으니/ 내가 너를 묻은 게 아니었다./ 네 안에 내가 묻힌, 너는 나의/ 무덤이었다 나는 네 울음에 갇히고/ 네 질탕한 웃음에 갇혔다… 사람들이 흘러넘치는 거리에서나/ 전동차 안에서도 어디에서나 네가/ 걸어나오고 어디에서나 너는 없었다.”(김길나, ‘정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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