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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스타 스포츠’ 와 베컴의 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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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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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리그중 유독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동경하는 한국 선수들
첼시 인수한 석유재벌 러시아인 아브라모비치도 잉글랜드 축구 부흥에 한몫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박지성의 꿈은 이루어졌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로 골인하는 꿈. ‘양박’의 꿈은 같았다. 박주영도 잉글랜드행을 꿈꾼다. “프리미어리거가 되고 싶다.” 박주영은 여러 번 신앙을 고백했다. 양박뿐 아니다. 누구보다 ‘유행’에 민감한 이천수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고전하면서도 언젠가 프리미어리그로 가고 싶다고 큰소리친다. 변함없는 잉글랜드 사랑을 과시해온 설기현은 잉글랜드 2부 리그인 챔피언십에서 뛰고 있다. 물론 그의 꿈도 프리미어리거다. 박지성의 맨유 입성으로 한국 선수들의 ‘영국병’이 깊어지고 있다. 신종 돌림병, 영국병은 왜 생겼을까?

넘버원 리그? 90년대엔 몰락의 리그


물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세계 정상권의 리그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다, 라고 하면 반발할 축구팬도 적지 않다. ‘잉빠’(잉글랜드 빠돌이)라는 빈축을 사기 십상이다. 지구방위대라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가 있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서포터를 거느리고 있다는 ‘유벤투스’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 세리에A, 두 리그가 프리미어리그에 견줘 떨어진다면 강하게 반발할 축구팬들이 적지 않다. 프리미어리그는 90년대 후반까지 두 리그에 견줘 조금 떨어지는 리그였다. 프리미어리그는 2002~2003 시즌에 이르러서야 세리에A, 프리메라리가와 같은 4장의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얻게 됐다. 그 전에는 두 리그보다 1장 적은 3장의 티켓만을 배분받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1999년 잉글랜드 FA컵 결승전. 이날 테디 세링엄(오른쪽)이 첫 골을 넣은 뒤 데이비드 베컴(가운데) 등과 함께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사진/ EPA)

대영제국 축구의 몰락은 1980년대 찾아왔다. 1985년 훌리건의 난동으로 39명이 숨진 헤이젤 참사는 대영제국의 몰락을 불러왔다. 헤이젤 참사의 주역이었던 리버풀은 7년, 잉글랜드 다른 클럽은 5년 동안 유럽클럽 대항전에 출전 금지를 ‘먹었다’. 세계 축구 흐름에 대한 ‘감’이 떨어진 잉글랜드 축구는 90년대는 내내 몰락의 길을 걸었다. 70~80년대 리버풀이 챔피언스클럽컵(챔피언스리그 전신)에서 4번이나 정상에 오르며 구가한 잉글랜드의 전성기는 과거의 영화에 불과했다. 리버풀을 대신해 맨유가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떠오른 것도 이때였다. 199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리그 정복은 잉글랜드 클럽의 정상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2005년 리버풀이 21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리하여 프리미어리그는 축구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프리미어리그는 실력으로 다시 정상에 서기 전부터 이미 인기로는 선두를 달렸다. 특히 아시아에서 그랬다. 한명의 스타와 한개의 채널과 한명의 구단주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일등공신이었다.

잉글리시로,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아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채널인 <스타 스포츠>는 줄창 프리미어리그를 중계한다. 프리미어리그는 마케팅 차원에서 아시아 시청자들을 의식해 아시아의 저녁 시간에 맞추어 경기 시간을 조절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10~12시께에 주요 경기를 볼 수 있다. 한국 시각으로는 밤 12~2시쯤이 된다. 하지만 프리메라리가, 세리에A를 보려면 눈을 부비면서 새벽 3~5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시아인이 프리미어리그에 중독된, 잉글랜드에 매료된 가장 큰 이유다. 한국 축구선수들의 영국병도 중계와 무관하지 않다. 한자로, 백문이 불여일견. 중계는 팬을 만든다.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자, 중국 텔레비전의 여성 아나운서가 울먹였다. 너무나 사랑하는 이탈리아가 진 것이 억울해서. 그 여성은 왜 아주리 군단의 패배를 중국 대표팀의 탈락만큼 슬퍼했을까?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를 보면서 축구팬이 됐기 때문이란다. 그들이 축구에 맛을 들인 90년대 초·중반은 세리에A의 전성시대였다. 혹시 한국의 청소년들도 10년 뒤 잉글랜드의 패배에 울먹일까? 그럴지도. 아시아인은 <스타 스포츠>의 주술에 걸려 ‘프리미어리그여 영원하라’를 외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하는 리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구세주로 평가받는 러시아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 그는 첼시를 인수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사진/ EPA)

물론 한명의 스타는 ‘데이비드 베컴’이다. 우리는 프리미어리그를 통해 베컴을 알기보다 베컴을 통해 프리미어리그를 알았다. 정확히 베컴을 통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알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통해 프리미어리그를 알았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화제를 뿌려대는 베컴의 존재는 축구스타 한명을 넘어서는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상품이었다. 데이비드 베컴이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로 팔려가자, 로만 아브라모비치라는 러시아인이 구세주로 등장했다. 석유재벌 아브라모비치는 2003년 7월 1억달러를 들여 런던 남부의 클럽 첼시를 인수했다. 첼시는 좋은 클럽이었지만, 명문 클럽은 아니었다. 아브라모비치 이전까지, 프리미어리그 중상위권을 오가는 팀이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첼시 인수 두달 만에 선수 영입에 2억달러 이상을 들였고, 2004년에는 10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첼시는 두어해 사이에 레알 마드리드만큼 비싼 클럽이 됐다. 아브라모비치 효과는 첼시의 부흥을 넘어 프리미어리그를 꿈의 리그로 만들었다. 심지어 스페인의 신성 레예스가, 포르투갈의 희망 호나우두가 프리메라리가가 아닌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다.

무엇보다 프리미어리그의 인기는 거품이 아니다. 잉글랜드 축구가 ‘킥 앤드 러시’로 불리는 ‘뻥축구’라는 것은 옛말이다. 프리미어리그에 유능한 외국 감독, 훌륭한 외국 선수들이 대거 영입되면서 잉글랜드 축구는 어느새 가장 빠르고, 가장 역동적인 축구로 탈바꿈했다. 황선홍이 은퇴 뒤 세계 축구의 흐름을 살피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스페인도, 이탈리아도 아닌 잉글랜드였다. 무엇보다 프리미어리그는 현재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하는 리그다. 팬이 많으니 재정이 튼튼하다. 어느새 프리미어리그는 구단 수입 합계가 13억파운드(2조3806억원)로 유럽 프로축구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18%)을 차지하는 부자 리그가 됐다(2003~2004 시즌 기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스포츠 기업으로 꼽히는 맨유는 프리미어리그식 경영의 상징이다. 그런 맨유에 박지성이 입단했다. 이러니 오늘도 우리의 축구 꿈나무들은 영국병에 걸려 맨유맨을 꿈꿀 수밖에. 영국병은 전염성이 강한 돌림병이다. 어쨌든 지성이면 감천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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