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삼순이, 삼식이, 쌈 싸먹기!

566
등록 : 2005-06-29 00:00 수정 :

크게 작게

칭찬이 넘실대는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날린다
30대 비혼 열성팬 기자들의 삼인삼색 뒷담화

리얼리티로 만든 신기루 연애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꼬인 가족사로 궁상떨지도 않고,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도 아니다. 연하남이 키스하는 척하면서 놀리면 밤새 “쪽팔려” 한다. 세상의 삼순이들이 ‘이거, 내 얘기잖아’라고 외치면서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줄을 섰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나 <섹스 앤 더 시티>에 있었던 동성친구, 연애와 직장생활의 코치는 없지만, 삼순이에겐 우리가 있기에 그는 외롭지 않다.

그래서, ‘나, 너랑 별다를 것도 없는데, 지금 구름 위에서 연애하고 있어’라는 암시는 드라마의 핵심으로 부상된다. 삼순이만 진짜이고 삼식이나 주변 인물, 계약 연애는 몽땅 가짜이지만, 삼순이가 ‘진짜’라 신기루 연애는 설득력을 확보한다. 진짜가 뭐냐고? 내가, 남이, 까발리는 속내들. 우린 터프하지만 소심하다. 우울과 짜증은 두통보다 흔하다. 캔디렐라에겐 없는 이 ‘미덕’을 맨얼굴로 드러내는 ‘센스’야말로 신세기 로맨스의 생존 전략이다. 어법은 진화했고, 우린 삼순이의 리얼리티가 건설한 ‘러브대교’를 타고 삼순이와 함께 연애의 섬으로 환상 여행을 떠난다.

‘러브대교’를 타고 연애의 섬으로!

삼순이는 '나' 다. 그래서 삼순이의 판타지 연애는 곧 나의 연애가 된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도 무례남, 예의남, 부자녀의 ‘신기루’와 가난녀의 ‘현실’이 공존했다. 그 여자의 억척스러움이 공중에 붕 뜬 ‘설정’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김래원이냐 강동원이냐로 드라마 캐스팅 논란이 분분한 인기 만화 <궁>에서도 여주인공만 ‘실존인물’이다. 집안, 성적, 외모가 평범한 여고생 신채경은 대한민국 어느 고등학교에 앉혀놔도 어색하지 않다. 그랬던, 그녀, 어쩌다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이 나라의 왕세자비가 되어 경복궁에 들어간다. 왕세자와의 쭈삣한 계약 결혼 생활, 재미있다. 그렇다면 드라마와 만화로 언니들을 사로잡은 일본 로맨스물 <너는 펫>은 어떤가. 신문사 여기자 스미레에게 어느 날 ‘미소년 무용수’라는 애완동물이 생기는데, 플라토닉한 동거는 삼순-삼식 버전보다 황당하기론 한 수 위지만, 엘리트 여기자의 소심하고 서투른 일상사가 꼭꼭 박혀 있기에 별 무리 없이 감정이입은 진행된다.

사실, 삼순이만큼 나이 먹은 우리들은 안다. 연애 경험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생활 몇년 간 행한 케이스 스터디는 판타지 로맨스의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걸 충분히 가르쳐줬다. 알바한다더니 유부녀랑 바람난 남자, 유학생활이 벼슬이라고 청소기 안 잡는 남자, 쿨하게 있다가 뒤늦게 이혼 경력 고백하고 끈적해진 남자. 나와 내 여자친구들의 남자들이다. 이들을 잠시 잊겠다는데 누가 우릴 말릴까. “신비주의냐” “드라마에선 꼭 피아노 치더라“라고 말하는 삼순이와 삼식이는 연애의 액자 바깥에서 연애를 희화화하지만, 액자 안에 그림이 없던가, 그들은 살짝 연애 중이다. 클래지콰이의 가 쿵작거릴 때 현실과 비현실은 잠시 타협하고 코믹 로맨스의 달콤한 몸부림이 이어진다.

그런데 요즘 삼순이가 ‘가짜’가 되려 한다. 직장인은 근무지를 이탈했다. 삼순이 너, 6월22일 사장네 호텔 개업식이라고 제주도 가선 울고불고 그랬지? 일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더라. 그건, 삼순이 스타일이 아니다. 작정하고 심각해지려는 드라마의 조짐에 이 팬의 마음은 싸늘해진다. 삼식이가 주먹으로 벽을 쳤을 때 설마했다. 뒤집어서 웃겨줘. 그런데 그거 정말 심각하게 벽을 친 것이었다. 당황했다. 삼순이랑 삼식이가 울기 시작한다. 이런, 김삼순씨 업무에 복귀해주세요. 연애도 하시는데요, 통장 잔고도 확인 좀 해주시고요. 당신이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궁상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드라마는 평범해집니다. 삼순이가 평범함을 버리는 순간, 드라마는 평범해진다. 그 구멍은 교통사고 롱숏 같은 화면발로도 ‘땜방’이 안 된다.

만화가 강경옥은 만화가 지망생이었던 동생의 습작에 관한 에피소드를 만화로 얘기한 적이 있다. 남, 여, 남, 여, 등장인물은 늘어가고 학원물에 교통사고와 선천적 지병이 동원되기 시작한다. 관계들은 밸밸 꼬이고 스토리는 극한에 치달았다. 결국 동생은 기숙사를 불태워버림으로써 만화를 깨끗하게 마무리해냈다고 강경옥은 전했다. 설마, 삼순이에게 진부하고 가혹한 ‘설정’의 쓰나미가 몰려오진 않겠지. 평범하게 웃겨줘.

왕자님은 소탈하기도 하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왕자님이 브라운관을 타고 안방에 현현하시었다. ‘내 이름은 진헌’ 아니 ‘내 이름은 삼식’이시다. 지금껏 수많은 왕자님들이 백마를 타고 브라운관을 지나치셨지만, 그분의 풍모는 남다르다. 한마디로 서민풍의 왕자님이시다. 오죽 평민들이 그분을 가깝게 느끼면 ‘현진헌’이라는 세련된 본명 대신 ‘삼식’이라는 서민적인 별명으로 부르겠는가? 그렇다. 그분은 저 높은 곳에 임하시는 분이 아니라, 저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21세기형 왕자님이시다. 무릇 우리 시대의 왕자님이란, 소탈해야 사랑받는다. 찰스 황태자가, 윌리엄 왕자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찬양한다. 삼순이는 유쾌하기도 하지~ 삼식이 왕자님은 소탈하기도 하지~.

택시 타고 나타나신 여관집 아들

서민풍의 왕자님은 세상 물정에 어둡지도 않다. 세련된 본명 대신 '삼식' 이라는 별명이 어울린다.

물론 그분, 어쩔 수 없이 돈 좀 있다. 물려받은 재산이니 어쩌겠는가? 물론 돈 있는 티도 자연스레 난다. 스물여덟의 나이(스물일곱인가? 헷갈린다)에 조금 큰 레스토랑 하나 운영하시고, 척 봐도 값나가는 옷도 입으신다. 하지만 그분은 일부러 있는 티 내지 않으신다.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치 않으신다. 호텔 재벌 2세이면서도 여관집 아들이라고 속이고 다니신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재민 오빠처럼 돈으로 마음을 사려고 애쓰지도 않으시고,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 왕자님처럼 저잣거리의 아이스크림도 잘 모를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둡지도 않으시다. ‘미지왕’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 ‘네이버’에 물어보는 ‘센스’도 있으시다(아마 한기주 왕자라면 비서 시켜서 알아봤을 게다). 게다가 왕자님 사상 최악의 상처도 있으시다. 교통사고로 다리도 다쳤고, 시련의 상처로 마음도 아프시다. “형을 죽였다”는 원죄 의식도 가지고 있다. 심지어 “하자 있다”는 소문도 있다. 우리의 삼식 왕자님 교통사고의 후유증 탓이기는 하지만, 백마를 버리시고 택시 타고 나타나시었다.

왕자님 가문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다. 어마마마는 왕자님이 삼순이 같은 평민을 며느릿감으로 데려와도 내치지 않으신다. 세간의 상식대로 대하신다. 그냥 지켜보겠다고 하신다. 괜히 재벌가의 위엄을 내세우지도 않으시고, 가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소동을 벌이게 하지도 않으신다. 가족의 일상에도 한점 권위의 냄새가 없으시다. 왕자님은 어마마마를 놀리듯 “나사장”이라고 부른다. 어마마마는 왕자를 쥐어박으면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고 패러디도 서슴치 않으신다. 출생의 비밀이나 가족의 갈등 따위의 고루한 코드도 없으시다. 그저 화목한 중산층 가정처럼 서로에게 살가우시다. 이만하면 삼순이들이 다이애나비를 꿈꾸며 두려움 없는 사랑에 빠져들기 안성맞춤이다.

삼식 왕자님, 심지어 미모도 따지지 않으신다. 오직 삼순이의 성격에 반하셨다. 평민 남성들도 외면한 삼순이의 숨은 매력을 용케 알아보시고 기꺼이 빠져주신다. 삼순이가 “나이 많고, 몸무게 많다”는 거 아시지만, “나를 웃겨주니까” 좋아하신다. 통통한 몸매? 모자란 얼굴? 걱정 마라. 유머감각만 단련하면 대박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왕자님 ‘빤따지’는 완성된다. 비록 아직은 삼순이의 코미디에 살짝 눌려 있지만 갈수록 삼식 왕자님의 풍모가 빛날 것을, 소녀들은 주먹 모아 단언한다.

추신. 음… 삼순이 너, 나이 속였지?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서른살이 그렇게 ‘댐비냐’? 요즘 여자 나이도 서른이면 결혼 적령이야. 세계 최고 수준의 만혼 국가 대한민국에서, 이미 서른살의 노처녀는 형용모순이지. 그런데 삼순이 너는 이번달 안에 애인 못 만들고, 올해 안에 결혼 못하면 영영 시집 못 갈 것처럼 굴잖아. 음…. 그러고 보니 김삼순양은 이미 사기 전과가 있네. ‘김희진’이라는 가명을 쓴 전력 말이야. 삼순이, 네 진짜 나이를 밝혀라! 뭐라고? 나이 까버리면 코미디 안 된다고? 누가 서른다섯살 노처녀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뒤집어지겠냐고? 아직 한국이 그렇다고? 이해해달라고? 쩝….

김삼순은 독신연대 조직원이다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우리 여성독신주의연대(이하 독신연대)의 초대회장은 B여사다. 그는 남자에 대한 자각심이 들 무렵인 여학생 시절부터 남학생에 대한 경각심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학교 교원으로 들어갔다. 자나 깨나 감시해야 했기에 사감 노릇까지 자처했다. 그의 유명한 연설의 한 대목은 이렇다. “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인 것.” 그를 따라 많은 나이 찬 여성들이 ‘결혼 거부’ 운동에 동참했다. 이를 결혼한 남성 기득권층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일류 소설가인 현진건은 이 영웅적인 인물에 스크래치를 내는 소설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주근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그는 이렇게 포문을 여는 소설 를 썼다. 이 소설의 공격적인 의도는 마지막에 드러났다. B사감은 한밤중 원맨쇼를 들키고 학생한테 “에그 불쌍해!”라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테제를 감정적인 동정으로 공격함으로써 불안감을 다독이려 했던 것이다.

불쌍해질수록 삼순은 힘차게 일어설 것이다. 그는 독신연대 조직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막강한 영향력에 독신연대는 독신주의자가 ‘결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여성’이 아니라는 당당함을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연애의 시대’였다. 그래서 새로운 실천 강령으로 “남성들에게 단물을 선사하고 차디차게 돌아서 눈물을 쏙 빼자”가 부상했다. 이것이 나름의 성과를 보인 것은 최희준의 노래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였다. 가사를 되새겨보면 이 조직원이 남자를 지 손아귀에서 갖고 놀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독신연대가 조직원 파견에 열중하고 분야는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독신주의자는 유부남을 빼앗는 주부의 적, 결혼 못한 여자, 결국은 결혼하는 여자였다. 독신연대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이러한 독신주의자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연대의 정치적 입장을 사랑 이야기에 녹여 사람들이 노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하지만 번번이 허사가 되었다. 원인은 시청률 압박이었다. 하지만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이 몇 작품 있긴 했다.

B사감, 올드미스, 험난한 계보들이여

먼저 <거짓말>(1998)이다. <거짓말>에서 성우(배종옥)는 서른세살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성우는 잘 살고 있는 유부남과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고 유부남의 아내와 진정한 우정을 나누었으며, 부부를 이혼하게 만들고도 자신의 고집을 지켜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다. 그 다음 <거침없는 사랑>(2002)이다. 서른한살의 텍스타일 디자이너 서영주(오연수)는 유부남 한정환(조민기)과 사랑하지만, 정환의 씩씩한 부인을 질투하지 않으며, 부부가 이혼했음에도 (상징적으로만) 재결합한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2004)도 있다. 이 드라마의 결혼하고 싶은 여자 셋은 아무도 결혼에 안착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서 승리한다. 주인공인 이신영(명세빈)은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기까지 한다. 이 드라마에서 혁혁한 공과를 세운 조직원은 장승리(변정수)였다. 그는 이미 위선적 결혼을 박차고 나왔고 “결혼을 생각하지 않으면 행복해진다”는 명언을 남긴다. 또 <올드 미스 다이어리>(2004~)의 세 젊은 여인과 세 나이 많은 여인들이 있다. 지금 최미자(예지원)가 위험하긴 하다. 아직 연대는 ‘경고’ 카드를 보였을 뿐지만 이 드라마가 로맨틱코미디의 본래 궤도를 타면서 연대의 ‘조직원 강퇴’ 경고를 받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활발한 조직원은 김삼순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출발한 것은 결혼정보업체 선우의 대표가 “독신주의는 결혼에 실패한 자들의 변명”이라고 말하는 등 적들의 도발이 거세지고 있던 참이었다. 김삼순(김선아)은 서른살 파티셰로 나온다. 지금 김삼순은 “너무 굶어서”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얼짱에게 넘어가 있는 (‘척하는’) 설정이다. 진헌(현빈)은 지금 옛사랑에 푹 빠져 점점 더 삼순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다. 불쌍할수록 우리는(앗! 갑자기 감정동화됐다) 힘차게 일어설 것이다. 이 드라마는 예전에 B여사가 당했던 설움까지도 씻을 요량으로 주인공을 현진건과 비슷하게 ‘현진헌’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진정 여성연대의 소망을 담은 드라마이며 역사적인 드라마인 것이다! (혹시 불안하여 한마디 덧붙인다) 우리는 삼순이 네가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이~.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