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어머니에게 곱게 조용하니 손자나 봐주길 바라는 걸까
성적 욕망을 품은 늙은 육체와 분노하는 딸을 그린 영화 <마더> ▣ 심영섭/ 영화평론가 여자의 이름은 ‘메이’였다. 한때는 5월을 닮았을 여자. 한때는 화가가 되었거나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는 여자. 한때는 누군가의 연인이었을 여자. 그러나 지금은 축 늘어진 가슴살과, 죽음을 앞두고 삶쪽의 열망에 더 바싹 얼굴을 돌린 영혼과, 얼굴도 재능도 지워진 단 하나의 명패로 남아 있는 여자. 어머니. 그녀의 이름은 ‘마더’이다. 딸의 남자를 훔친 여자, 메이
나는 술을 먹으면 가끔 어머니에게 안기며 어리광 피우듯 물어보았다. “엄마. 나 궁금한 것 있는데. 지금도 아빠랑 같이 자?”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입을 반즈음 내밀며 또 한쪽으로는 손사래를 치며 “남세스럽긴. 늙은이들이 뭘. 넌 애가 왜 그런 걸 물어보니”라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곤 하셨다. “나 다 컸어. 그런 거 다 이해해.”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고,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손을 잡기는커녕 아버지 옆에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봄날, 생일을 앞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선물로 사드린 잠옷조차 아버지처럼 옷장 속에서 잠자던 날, 아버지 병간호에 지친 어머니는 어느 해 저녁 포도주를 드시고는 난생처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우셨다. “무심한 양반. 니 아버지 이제 영영 가나 보다. 너 언젠가 니 아버지랑 나랑 자냐고 물어봤지? 우리 각방 쓴 지 오래됐다. 혈압 오른다고 니 아버지 내 옆에 얼씬도 안 해. 소 닭 보듯이 말야. 그동안 내가 정말 여잔가 싶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머니를 꼭 안았다. 품 안의 그녀는 부피가 없었고, 그 속은 나 역시 언젠가 비추어볼 죽음의 거울처럼 어둡고 매끄러웠다. 로저 미셸 감독의 영화 <마더>는 어머니의 육체 위에 성적 욕망을 포개놓는다. 여주인공 메이는 갑작스레 남편을 잃었고, 상심을 달래려 머무른 아들의 집에서 목수인 대런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대런은 딸 폴라와 사귀고 있는 유부남. 폴라는 대런의 마음을 떠봐달라고 메이에게 부탁하지만, 메이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자유분방한 대런에게 사랑을 느낀다. 어느 화창한 대낮. 메이와 대런은 사랑을 나눈다.
영화 <마더>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성’이나 ‘여성의 성욕’ ‘노년을 슬기롭게 보내는 법’같은 슬로건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성’을 목격할 때 느끼는 생경함일 것이다. 길거리에서 가족을 마주칠 때처럼 가장 가까이 있다고 믿는 자가 타자가 될 때의 느낌. 그러니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모든 성’. 이게 실감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실패다. 그렇기에 메이 역의 앤 레이드는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고 둔한 선의 몸매를 지녔고, 그 편이 훨씬 영화에 다가가게 만든다.
<노팅힐>의 감독 로저 미셸의 카메라는 한 여성의 쇠락해가는 육체뿐 아니라 그 육체를 거스르는 내면에 섬세한 시선을 보낸다. (역시 노년의 성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 박진표 감독이 그러했듯이.) 관음의 느낌을 지우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 가족의 내분과 외환을 묵묵히 지켜본다. 남편이 죽었을 때 비어 있는 신발을 오래 응시하던 로저 미셸의 카메라는 이윽고 딸의 남자인 대런과 키스하는 메이도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다. 메이의 텅 빈 공허감을 반영하는 클로즈업, 누군가와 누군가의 영향력에 있음을 은유하는 어깨 너머의 대화들,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네모난 프레임에 갇혀 있는 어머니라는 여자를 잡아내는 그의 연출 솜씨는 부드럽고 표가 나지 않는다.
중산층과 어머니… 성과 계급을 엮다
그러나 하니프 쿠레이시의 각본은 그렇지 않다. 그는 명백하게 노년에 일어날 수 있는 ‘역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전투적이고 도발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직면시킨다. 왜 이 영화에서 모든 정사 장면은 언제나 누군가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어머니는 아들의 집에서 딸의 남자와 섹스하는 어머니인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의 정사를 우연히 보게 되는 것과는 정반대로 여기서는 어머니가 딸의 정사를 우연히 보게 되고, 이윽고 딸의 남자를 욕망한다. (정신분석을 받고 온 딸은 오히려 내가 안 풀리는 것은 이기적인 어머니 탓이라 해석한다.) 어머니와 딸이 여자로서 경쟁할 수 있다는 생각. 딸이 어머니를 한방 때릴 수도 있다는 생각. 들끓는 성적 욕망을 언어로써 가시화하는 데 가장 먼 곳에 있는 장소인 집. <데미지>에서부터 <스타워즈>까지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신물나는 오이디푸스적인 관계를 반복하는데도 영화 역사는 이상하게도 어머니와 딸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새미와 로지 그것을 하다> <정사> 등을 통해 늘 계급과 성의 문제를 함께 아우르는 하니프 쿠레이시는 아예 ‘어머니의 성’에 중산층 ‘가족’내에 잠재해 있는 권력의 문제를 함께 사색하게 만든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곱게 조용하게 손자나 봐주면서 늙어가길 바란다. 어머니가 딸에게 “너희들 너무 차가워졌구나”라고 말하자 “엄만 어떻게 그렇게 뜨거워지셨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니까 가야트리 스피박의 용어를 빌리자면, 중산층 가정 내에서 늙어가는 어머니 역시 자신의 주체성을 억압당하는 ‘하위주체’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내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된다. <집으로…>가 좋은 영화라며 모시고 갔더니, “저 할머니 내 이야기 아니다”라면서 극장 문을 총총걸음으로 나오던 어머니. 늙어가면서 꿈에도 못 잊었던 영문학을 배우기 위해 영어 카세트를 듣고 또 듣는 어머니. 이제는 옷장 깊숙이 꽁꽁 숨겨져 리본으로 칭칭 묶여 있는 빛바랜 러브레터 속에서만 희미한 이름으로 남아 있는 여자. 40여년 전 아버지가 ‘너무도 강렬히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소’라고 썼던 바로 그 여자. 이제는 정말 어머니란 명패 대신 예쁜 그녀의 본명을 찾아주고 싶다. 아니 불러주고 싶다. 하늘에다 대고 큰 소리로 “예영 씨!!!” 이렇게.
성적 욕망을 품은 늙은 육체와 분노하는 딸을 그린 영화 <마더> ▣ 심영섭/ 영화평론가 여자의 이름은 ‘메이’였다. 한때는 5월을 닮았을 여자. 한때는 화가가 되었거나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는 여자. 한때는 누군가의 연인이었을 여자. 그러나 지금은 축 늘어진 가슴살과, 죽음을 앞두고 삶쪽의 열망에 더 바싹 얼굴을 돌린 영혼과, 얼굴도 재능도 지워진 단 하나의 명패로 남아 있는 여자. 어머니. 그녀의 이름은 ‘마더’이다. 딸의 남자를 훔친 여자, 메이
나는 술을 먹으면 가끔 어머니에게 안기며 어리광 피우듯 물어보았다. “엄마. 나 궁금한 것 있는데. 지금도 아빠랑 같이 자?”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입을 반즈음 내밀며 또 한쪽으로는 손사래를 치며 “남세스럽긴. 늙은이들이 뭘. 넌 애가 왜 그런 걸 물어보니”라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곤 하셨다. “나 다 컸어. 그런 거 다 이해해.”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고,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손을 잡기는커녕 아버지 옆에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봄날, 생일을 앞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선물로 사드린 잠옷조차 아버지처럼 옷장 속에서 잠자던 날, 아버지 병간호에 지친 어머니는 어느 해 저녁 포도주를 드시고는 난생처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우셨다. “무심한 양반. 니 아버지 이제 영영 가나 보다. 너 언젠가 니 아버지랑 나랑 자냐고 물어봤지? 우리 각방 쓴 지 오래됐다. 혈압 오른다고 니 아버지 내 옆에 얼씬도 안 해. 소 닭 보듯이 말야. 그동안 내가 정말 여잔가 싶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머니를 꼭 안았다. 품 안의 그녀는 부피가 없었고, 그 속은 나 역시 언젠가 비추어볼 죽음의 거울처럼 어둡고 매끄러웠다. 로저 미셸 감독의 영화 <마더>는 어머니의 육체 위에 성적 욕망을 포개놓는다. 여주인공 메이는 갑작스레 남편을 잃었고, 상심을 달래려 머무른 아들의 집에서 목수인 대런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대런은 딸 폴라와 사귀고 있는 유부남. 폴라는 대런의 마음을 떠봐달라고 메이에게 부탁하지만, 메이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자유분방한 대런에게 사랑을 느낀다. 어느 화창한 대낮. 메이와 대런은 사랑을 나눈다.

영화 <마더>는 '내 어머니의 모든 성'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