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간밤에 고마웠다

565
등록 : 2005-06-22 00:00 수정 :

크게 작게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맹세코 그를 상대로 불온한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보편적으로 섹슈얼한 긴장을 일으킬 태도나 외모의 소유자가 아닐뿐더러, 내 취향도 아니다. 서로 찝쩍댄 적도 없다. 한마디로 소와 닭 같은 관계였다. 그런 그가 내 방에서 에로틱하게 놀다 간 것은 두고두고 미스터리다. 꿈에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나 말고 다른 여자 동료와도 정을 통했는데, 아 그것도 꿈에서였다, 여자 동료와 나는 많은 토론을 했다. 내 거다 니 거다 잠깐 다투기도 했지만 중요한 건 그가 단 한번씩이나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궁금증은 남는다. 사건 발생 당시 우리 둘 다 파트너가 있었고, 특별히 아쉬울 때도 아니었다.

평소 꿈도 꿔보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불쑥 진짜 꿈에 나타나 질펀하게 놀다 간다면? 음, 그는 무의식의 영역을 주름잡는 진정한 섹시가이란 말인가. 정신과 전문의들에게 물어보았다. “꿈에 대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할 수 없다. 본인이 그 연유를 따라가 보면 짐작이 될 텐데, 어떤 상징이겠지”라는 답변이 가장 친절했다. 한데 왠지 국영수 중심으로 암기과목 열심히 하면 대학 간다는 말 같다. 돈 안 내고 상담 받으면 이렇게 찜찜한 법이다. 친절한 정씨 성의 전문의가 되물었다. “그래서 어땠나?” 다음날 아침 약간의 민망함은 있었지만 출근하는 그를 보고 “간밤에 고마웠다”고 인사할 뻔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진정하고 연유를 짚어보자. 그의 특징과 나의 상태를 점검하면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그의 특징. 1. 내가 막 침 튀기면서 떠벌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끝까지 얘기를 들어준다(참을성이 많다). 2. 간단하게 자문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아예 자기가 다 취재해서 ‘토스’해준다(친절하다). 3. 기사를 많이 쓴다(그래서 내가 메워야 할 지면이 꽤 준다). 4. 밥 먹을 때 가까이 앉으면 좋다(많이 먹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많이 먹을 수 있다). 5. 혼자 벌어 가족을 먹여살리면서도 피곤한 티 안 낸다(특히 자식 얘기를 늘어놓지 않는데 ‘애들은 그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키우면 그만’이라는 철학의 소유자다).

이번엔 그를 ‘공유’했던 나와 여자 동료의 공통점. 1. 회사에서 잘릴까봐 전전긍긍한다(내 밥 내가 벌지 않으면 당장 집에서 쫓겨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2. 출산·육아에 대한 공포가 크다(혹시 임신이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그 공포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3. 게으르고 능력도 안 된다(회사일뿐 아니라 집안일에서도). 4. 아무하고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한마디로 성격이 나쁘다). 5. 엥겔지수가 아주 높다(먹는 걸 밝힌다).

럴수럴수 이럴 수가. 그가 상징하는 것은 자애롭고 능력 있는 모성상이다. 세상에 어머니 같은 남자에게 꼴리다니.

내 마음은 데이비드 베컴을 향하면서도 내 몸은 곰돌이 푸우에 반응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무의식과 의식의 이 도저한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불 끄고 신문지 덮고 하면 될까? 그날 이후 나는 부쩍 잠이 많아졌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김소희의 오마이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