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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코코샤넬이 될 운명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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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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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패션 70s>에 숨겨진 깜찍하고 끔찍한 트릭들
물만 보고 자란 섬소녀의 재능은 ‘부자 유전자’가 이미 보증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국희> 정성희 작가가 <국희>가 끝날 때부터 구상했다는 장대한 스토리, 결혼 뒤 방송 중단을 선언했던 이요원의 복귀작, ‘광복 60년 SBS 대기획’이라는 말, 고화질(HD) 촬영, 파주 세트장. 이 중에 하나에도 혹하지 않는다면 이건 어떤가. <다모> 이재규 PD의 작품. 시청자는 연출자를 믿고 작가를 믿고 배우를 믿는다. 투여된 제작비가 많을수록 좋다는 자본의 법칙도 믿어본다. <패션 70s>는 이렇게 팡파르를 울리며 시작됐다. 그런데 본격적인 무대 70년대가 열리고 한숨 돌리고 나니, 이거 깜찍한 트릭이 아니었을까 싶다, 에잇.

아역의 트릭, 집중력이 필요해요


먼저 작은 트릭 이야기. 1~4부는 잘살던 여자애가 가난한 어머니에게로, 가난한 여자애가 부잣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설명하는 데 할애된다. 그러니까 갈등을 품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도록 달걀 거품 내듯이 휘저어놓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제작진은 ‘비슷하게 생긴 어린 역을 고른다’는 관습을 무시하고 트릭을 썼다. 주연 배우들을 어린 시절 아역과 연결해보자. 여자 주연은 방송 전부터 여러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대로 이요원, 김민정이다. 그러면 두 여자 아역을 한번 보자. 아이들은 이름을 잘 모를 테니 아래에 배열한다.

<패션 70s>의 아역은 5회 만에 자라났다. 그런데 아역과 성인 배역을 연결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왼쪽부터 천정명, 김민정, 이요원, 주진모.

야윈 여자애를 야윈 이요원에, 눈 큰 여자애를 눈 큰 김민정에 연결한다. 삑~ 틀렸다. 이요원의 극중 이름은 더미, 김민정의 극중 이름은 고준희다. 큰 여자애는 강희, 작은 여자애는 준희라 불린다. 그렇다면 더미는 강희, 준희는 준희, 맞잖아. 삑삑~ 틀렸다고요. 정답은 이렇다. 극중 이름 더미인 야윈 이요원은 눈 큰 고준희라 불리는 통통한 여자애에, 극중 이름 고준희인 눈 큰 김민정은 야윈 강희라 불리는 여자애에 연결된다. 트릭을 써서 운명이 바뀐다는 사실을 숨겨서 충격을 주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렇게 헷갈리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효과는? 아파트 이름을 아침도시니, 꿈에 그린이니, 푸르지오니로 바꾸고 나니 시골 부모님 찾아오기 어렵게 된 꼴이다(일부러 바꾼 거라고도 하는데 그 자식 마음이 제작진 마음은 아니겠지).

‘비슷하게 생긴 어린 역 고르지 않기’ 원칙은 남자애들에게도 해당된다. 사실 이건 어디까지가 트릭이고 어디까지가 연상 작용의 실패인지를 모르겠다. 다르게 생각하자면 트릭을 쓰지 않아도 될 때 쓴 거거나 캐스팅의 실수 같다. 똘망똘망하고 어려 보이는 아역은 주진모가 되고, 목소리 굵고 듬직한 아이는 70년대 사교계의 황태자 천정명이 된다. 어찌됐든 시청자를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관람 행태로 인도할 요량이었다면 성공이다. 그런데 제작진도 헷갈린 게 아닌가 하는 사건이 있었다. 어린 시절 동영(주진모)은 어머니 유품 도난 사건 때문에 어린 시절 강희(큰 준희)를 벌레 보듯 한다. 그런데 그들이 성장하고 나니 연인이 되어 있다. 딸 준희를 잃어버렸다고 같이 있던 강희를 ‘고준희’라고 (호명이 아니라) ‘임명’하는 아버지 심사도 이상한데, 어린 시절 원한을 잊고 사랑하게 되기까지 한 남자의 인생 여정도 이상스럽다.

정민아, 변주연.

그래, 이쯤에서 단순한 트릭은 끝내자. 이제 장대한 이야기가 시작될 참에 그런 거에 시비거는 것이 쪼잔해서가 아니라 좀더 장대한 트릭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깜찍한 트릭은 예고편에 불과한 것 같다. 한국 드라마가 즐겨 쓰는 다 알쪼의 트릭들을 초반을 지나면서 곳곳에 숨겨놓은 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포화와 한국사의 질곡 속에서 풀어낸 게 결국은 ‘출생의 비밀’이다. 출생의 비밀 드라마의 키워드는 ‘부자 유전자는 선’이라는 것이다. 부자 유전자가 가난한 환경 속으로 뒤바뀌어 들어갈 때 항상 ‘본성론’이 승리했다.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못 먹는 것보다 이게 <패션 70s>에서는 큰 일일 것이다) 불쌍히 자랐으니 여생이라도 즐겁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 유전자= 재능 유전자’라는 공식

<패션 70s>는 이 부자 유전자의 승리에 다른 하나 더의 이야기를 보탠다. ‘부자 유전자=재능 유전자’라는 공식이다. 더미(이요원)가 된 어린 시절 준희는 전남 진도의 맹골도에서 은둔하면서 성장하지만 결국 바라던 뭍으로 나가게 되어 신고 끝에 성공한다. 더미의 성공 모델은 코코 샤넬이라고 한다. 더미는 여기도 출렁 저기도 출렁 물만 보며 자랐지만 성장 환경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패션 재능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나 보다(맹골도가 옷 맹글라고 있는 신비의 섬이라면 또 모르겠다). 거기다 ‘부자 유전자=사랑받는 유전자’이기도 하다. 보아하니 두명의 남자는 모두 더미에게 순정을 바칠 작정이고, 패션모델을 시작할 때부터 주위의 시선이 따가운 ‘임명된 준희’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트릭을 쓸 것이다.

마술사들은 연기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좋아했다. <패션 70s>는 연기가 유난히 자욱했다. 포화 터지는 전쟁터에서 여진이 곳곳에서 번졌고, 시장통 흙길에서는 걷고 뛸 때마다 먼지가 솟아올랐다. 비가 오는 날이 또 많아 여기저기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비행기를 없앴을 때 관객들이 박수를 친 건 그가 비행기를 진짜 없애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감쪽같이 속였기 때문이다. <패션 70s>도 시청자를 속일 마지막 카드가 있다. 70년대 패션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단단히 붙잡아두는 것이다. 이 정도의 ‘지상 최대 마술’이라면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제발 그렇게만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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