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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공미술의 적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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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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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와 대화하는 환경조형물로 탈바꿈하기 위한 문화관광부 개정안
금전적 야합이 만들어내는 길거리 미술장식품을 몰아낼 수 있을까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설치미술을 하는 조각가 홍영인씨는 무대 위의 커튼 같은 천을 주름 잡아 연극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때 주름천에 싸인 공간은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공간과 천의 어울림을 통해 미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컨대 서울 인사동 들머리에 있는 안국동 우체국을 소재로 한 ‘하늘 공연장’은 기능적인 공간에서 미적 체험을 하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이는 미적 대상에 머물던 작품이 소통의 도구로 공공성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간의 재해석을 통해 공공성을 강화하는 셈이다. 만일 홍씨의 작품을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본다면 공공장소가 다양한 모습으로 대중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당안리 발전소의 둔갑, AV프로젝트


공공미술은 화력발전소의 굴뚝을 문화발전소의 상징으로 만들 것인가. 홍영인씨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당인리 발전소의 굴뚝에 주름천을 입혔다.

요즘 서울시 마포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동교동 사무소나 마포평생학습원, 장애인 복지원 등지에서 홍씨가 작업한 이색 포스터에 눈길을 돌려볼 만하다.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이 당인리 발전소를 2012년부터 3년에 걸쳐 ‘당인리 문화발전소’로 조성하는 방안을 발표한 시점에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상징적 공간이 창의문화의 산실로 바뀌는 것을 ‘AV 타워’(Art Ventilation Tower)로 표현한 이미지다. 당인리 발전소가 리모델링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현장 설치물과 굴뚝을 감싼 붉은 주름천의 방진막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AV 타워로 표현된 화력발전소의 굴뚝은 문화 생산력을 상징한다.

“AV 타워는 문화발전소의 환기구 구실을 한다. 대중과 호흡하는 새로운 문화예술 환경을 조성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면 그것을 대중과 함께 실천하고 싶다.” 앞으로 홍영인씨는 대중의 참여를 통해 문화발전소의 기념비적 상징물인 AV 타워를 세우려 한다. 이를 위해 마포구 일대에 포스터를 부착해 지역 주민의 이해를 구하고 동의를 얻으려 한다. 홍대 앞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쌈지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퍼블릭리 스피킹’(Publicly Speaking)전에 AV 타워 프로젝트를 전시하며 뜻에 공감하는 관객들이 대형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는 ‘당인리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듯 건물의 장식품쯤으로 여기던 공공미술이 서서히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공미술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에 설치·전시하는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여기에서 ‘장소 지정형 미술’(Site-Specific Art)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미술작품이 소통을 통해 참여를 유도하기보다는 미술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기 일쑤였다. 마치 거리의 ‘예술 권력’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쌈지스페이스 신현진 큐레이터는 공공의 개념이 자리잡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공공의 개념을 시장의 논리나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 영역에 대한 공공성을 제대로 부여하기 어려웠다.”

애당초 공공미술이라는 용어는 30여년 전에 영국인 존 윌렛이 <도시 속의 미술>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미술작품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즐기는 데서 벗어나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공공미술의 개념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조각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남자>나 헨리 무어의 조각작품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때론 서울 강남 포스코빌딩 앞에 있는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처럼 무려 30t에 이르는 조각상이 공간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은 공공의 개념을 물리적 공간에 미술적 오브제를 설치 전시하는 것으로 여기는 한계를 보였다.

한 작가가 200여점 수주하는 기현상

초창기 공공미술의 조형미로 도시의 표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남자>.

그러다 공공의 개념이 장소보다는 대중과 환경·공간의 공공성 등의 의미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작가나 설치자 중심에서 보는 사람과 공간 환경 등 수용자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수용자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공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예컨대 파리 20구에 있는 시장은 상점의 셔터가 내려지면 미술 전시장 구실을 했다. 셔터마다 특색 있는 그림을 그려 허름한 시장이 예술적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공공미술 기획자로 활동하는 박삼철(아트컨설팅서울 소장)씨는 “공공미술이 대중에게 다가선 환경 조형물 혹은 거리의 미술관이 되려면 사회와 미술의 올바른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전히 국내에서 공공미술의 자리는 좁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지난 1995년부터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신축 또는 증축할 때 건축비용의 1% 이상(2000년 1% 이하로 하향 조정)을 미술 장식에 사용하도록 했다. 미술 창작 기회를 확대하면서 문화예술의 진흥과 도시환경의 개선을 꾀하려는 의도였다. 이 제도에 따라 지난해만 해도 건축물에 미술 장식품 959점을 설치하는 데 700억원이 소요됐다. 작품당 평균 설치금액이 7300만원에 이르는 셈이다. 이쯤 되면 거리의 미술관에서 다양한 색깔의 작품을 거리에서 감상할 것이라 기대할 법도 하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시청 반경 1km 이내에 비슷한 작품이 6개나 설치돼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설치된 건축물 미술 장식품 5600여점 가운데 조각 작품이 4천여점이나 된다. 그것도 일부 조각가들이 작품 수주를 독식하다 보니 한 작가가 200여점을 수주하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건축주가 작가 선정이나 작품 설치 과정을 주관하기에 공정한 심의 절차 없이 작가를 선정하는 탓이다. 이 과정에 브로커 구실을 하는 미술단체가 개입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문화관광부 김갑수 예술정책과장은 “공공미술이 장식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로 진화하고 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미술을 통한 시민들의 커뮤니케이션을 확대하며 시민 문화 공동체 형성을 위해 미술 장식품의 공공성을 강화하며 선정 과정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문화관광부는 건축물 미술장식제를 공공미술제로 바꾸는 내용의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여기엔 건축주가 건물에 미술품을 직접 설치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총건축비 대비 0.7%보다 낮은 비율로 공공 미술기금을 내거나 지자체장에게 설치 대행을 의뢰하는 방식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문화부 산하에 공공미술진흥위원회를 두고 공공미술 정책과 설치작품의 기획 심사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미술 장식품 수주 비용의 50% 이상을 브로커가 삼키고 심지어 수주 비용에서 일정액을 건축주에게 되넘기는 금전적 야합을 막겠다는 것이다.

공공미술의 개념을 확장하라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신사옥에서 열리는 ‘공즉시색’전에 선보인 이웅배씨의 <병촉야유>는 의자이면서 가로등 구실도 한다.

기존 미술 장식품 시장에 깊숙이 관여한 미술단체들은 개정안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공공미술협의회(아래 공미협)를 결성해 “미술 장식과 공공미술은 다르다”는 반대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한마디로 공공미술은 정부에서 따로 예산을 편성해서 지원하고 미술 장식품 시장은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 논리대로 풀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미술인회의 전용석 공공미술분과장은 “일부 지자체에서는 공공기관의 작품 선정에 심의위원이 자신의 작품을 뽑기도 한다. 언제까지 장식 개념의 미술에 공공미술을 맡길 수는 없다. 실내 전시작을 외부 공간으로 옮기는 식의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당장 공공미술의 개념이 미술 장식품을 포괄하는 폭넓은 의미로 자리잡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AV 타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작가와 지역 주민이 열린 형식의 실천적 문화를 일궈도 공사가 실현되지 않으면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 장식품을 공공미술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 우선 건축 속의 미술이 대중과 소통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본보기도 있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신사옥 안팎에 설치된 ‘공즉시색’전의 작품들은 공공미술이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주면서 도시의 표정을 만들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대중과 미술의 즐거운 만남이 그곳에 있는 셈이다. 지금은 진화를 꿈꾸는 공공미술에 날개를 달아줘야 할 때다.


일산가구공단의 이색 족구장

‘공공미술 프리즘’의 동네 트로젝트는 계속된다

공공미술 프리즘 회원들과 경기도 고양시 덕이동 주민들이 함께 만든 일산가구공단 족구장(위). 아래는 청년회 사무실 외벽을 색칠하는 모습. (사진/ 윤운식 기자)

미술인과 지역 주민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지난 6월4일 경기도 고양시 덕이동 일산가구공단에 들어선 ‘이색 족구장’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날 개장한 족구장은 ‘공공미술 프리즘’에서 기획한 ‘동네와 일터에 우리가 만든 족구장’ 프로젝트 1탄이다. 경기도문화재단이 마련한 공공 실험예술활동 지원사업에 채택돼 1천만원을 후원받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모두 5곳에 공공미술을 세례받은 족구장을 만들 예정이다. 대중 스포츠로 자리잡은 족구가 미술인과 주민의 참여를 통해 예술적으로 거듭나는 셈이다.

지난 3일 개장을 하루 앞둔 일산가구공단 족구장은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공공미술 프리즘 회원들과 가구공단 주민이 만난 지 한달 보름여 만에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처음 기획할 때부터 최종 제단 단계까지 주민들과 공동작업을 했다. 이미 폴리우레탄칩을 이용한 스포츠 바닥재를 깔고 떡살 무늬를 본뜬 전통 문양도 새겼다. 이날은 청년회 사무실 컨테이너 외벽을 말끔하게 단장하면서 다음날 행사 때 방명록으로 사용할 원형 합판에 색칠을 하고 있었다.

올해로 4년째 공공미술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지내는 공공미술 프리즘의 유다희 대표는 미술을 통한 의식의 확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해 특정 공간에 어울리는 미술문화를 실현하고 열린 문화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고가의 장식품을 설치하는 것만이 공공미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반 시민들이 공공미술 작업에 참여해 예술적 운동공간을 만드는 데 뿌듯함을 느꼈다. 공공미술의 참뜻을 생각하면서 버려진 공간에 생기를 부여했다.”

그동안 공공미술 프리즘은 참여형 문화를 일구면서 무미건조한 공간에 예술적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들의 손길을 통해 서울 구로구 영일초등학교 놀이터가 변신에 성공했고,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 주변이 시민참여 조형물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이때 공공미술 프리즘 회원들은 시민과 자원봉사자 등 모두 100여명과 함께 길이 30m, 높이 2m 크기의 대형 벽화를 상록수역의 명물로 남기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성남시 은행공원의 벽화 제작을 의뢰받았지만 담당 공무원이 세련미를 내세우는 바람에 실행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산 언덕에 연립주택이 빼곡한 동네에 화려한 성처럼 들어선 공원이었다. 공공미술 활동가로서 주민과 함께 유쾌한 작업을 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세련된 벽화로 동네와 공원의 부조화를 더욱 심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족구장 프로젝트는 행복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동네 주민들이 족구장 테두리에 숨은 그림 솜씨를 맘껏 뽐내면서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공공미술의 활성화라는 ‘짐’을 먼저 짊어졌다는 이유로 ‘대가 없는 봉사’에 만족하는 공공미술 프리즘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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