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선수들의 무적군단’ 여자 핸드볼팀의 아름다운 플레이
2003 세계선수권대회를 보며 세번이나 ‘허걱’거린 이유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복수혈전은 쓸쓸했다. 한국은 올림픽 1주년에 덴마크를 안방으로 불러들였고, 2번의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여자 핸드볼 이야기다. 어쩌면 허튼 짓이다. 하지만 이해된다. 그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래고 싶을 만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의 아쉬움이 컸다. 아니 원통하고 억울했다. 내 인생의 경기를 꼽으라면, 나는 그날 경기를 택하겠다. 은메달의 웃음은 올림픽의 백미!
그 경기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있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선수들의 일치단결, 백전노장들의 희생과 팔팔한 신예들의 헌신, 모든 것이 풍족한 상대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우리, 생계를 위해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할 절박한 사연,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함성을 토하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승부,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패배가 있었다. 그날의 승부는 패배로 완성됐다. 통한의 패배를 통해 달콤한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냈으므로. 언니들은 오늘도 나의 노트북 바탕화면에서 웃고 있다. 그렇다. 그날, 언니들이 웃었다. 다행히 울다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좋았다. 그 웃음은, 이제 우리도, 지면 무조건 우는 후진국 운동기계가 아니라, 져도 웃을 수 있는 자유로운 스포츠맨이라는 선언 같았다. 굿바이, 박정희 전두환! 헝그리 스포츠와 스파르타식 훈련에 보내는 아름다운 작별인사였다. (덧붙이자면, 은메달의 웃음은 아테네 올림픽의 백미였다. 장미란이 중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기고’도 멋지게 미소를 지었고, 이배영이 금메달을 놓치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마침내 한국 스포츠가 독재정권의 잔재인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정말 멋진 작별인사였다. 웃어라, 은메달!)
나도 당신처럼, 4년에 1번씩 핸드볼 팬이 된다. 올림픽 때만 되면 열성팬이 된다. 나의 스포츠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 중 하나는 88년 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이었다. 한국이 소련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예매한 표가 남아서 암표 장사도 했다). 일찍이 올림픽도 시작하기 전, 여자핸드볼 결승전을 예매했던 선견지명을 아직도 뿌듯해하고 있다. 그때 나는 중딩이었다. 그 뒤 어언 17년, 아직 한번도 핸드볼을 경기장에서 본 적이 없다.
그리고 16년은 암전이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자 핸드볼팀은 92년 올림픽 금메달, 96년 은메달, 2000년 4위를 했다. 무척 잘했지만, 완만한 하강세였다. 4년마다 돌아오는 팬클럽도 시들해졌다. 누가 뛰는지, 누가 은퇴했는지, 잘 모르고 지냈다. 간간이 팀 해체 소식이 들렸다. 해체되는 팀이 핸드볼팀만은 아니었으므로 그저 해체되는가 보다 했다.
강산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뛰어?
그러던 2003년 어느 겨울밤, 스포츠 전문채널을 돌리다가 ‘허걱’했다. 2003년 세계여자핸드볼 선수권대회, 한국이 3·4위전을 치르고 있었다. 경기를 보면서 세번 ‘허걱’했다. 일단 올림픽보다 힘들다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올랐기 때문에 허걱! 한국 여자핸드볼이 몰락한 줄 지레짐작했던 나의 허를 찔러주어서 허걱! 두 번째는 화면을 보며 ‘허걱’! 눈을 씻고 다시 보며 허걱! 아니 저 언니들이 누군가? 임오경, 오성옥? 2000년에도, 96년에도, 아니 92년에도 보던 언니들 아닌가? 이상은, 오영란이 몇살인가? 서른을 넘기고도 두세살은 더 먹은 언니들 아니던가? 강산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뛰어? 그것도 주전으로? 말도 안 돼! 이건 동방예의지국의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사건이었다. 금메달을 따자마자 은퇴하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조로’의 풍토야말로 한국 스포츠의 오랜 미풍양속 아니던가? 이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작에 사라진 줄 알았던 신화들의 당당한 현현에, “언빌리버블”(Unbelievable)! 혼자 미친놈처럼 외쳤다.
해설을 들으면서 세 번째 허걱! “이상은 선수는 무적선수죠.” 아니? 무적선수? 적수가 없는 선수? 맞지. 그런데 아니지. 적(籍)이 없는 선수! 이상은이 누군가? 한국의 에이스이자 세계의 골게터 아닌가? 그런데 그가 무적선수라니, 언빌리버블! 해설자의 전갈, 이상은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소속팀 알리안츠생명이 해체됐단다. 무적선수들은 무적선수들이었다. 오영란도, 명복희도 ‘놀고’ 있었다. 임영철 감독도 실업자 신세였다. 핸드볼팀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때도 해체됐지만,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해체됐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 중소기업들이 몰락하면서 중소기업이 운영하던 핸드볼팀도 해체됐기 때문이다. 팀이 해체하면 선수는 은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언니들은 객지 생활로 선수 생명을 이어갔다. 오영란은 노르웨이까지 가서 뛰었다. 맏언니 임오경과 오성옥은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임오경은 일본 메이플레즈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오성옥이 임오경의 뒤를 따랐다. 언니들이 해외를 전전하는 사이, 여자 핸드볼은 침체에 빠졌다. 한국은 아테네행 아시아 티켓을 중국에 빼앗겼다. 언니들이 구원에 나섰다.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크라이나를 물리치고 3위를 차지해서 겨우 올림픽 티켓을 땄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올림픽에서 명승부에 명승부를 거듭했다. 덴마크와의 첫 경기부터 마지막 경기까지, 나는 한국 여자핸드볼팀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들은 승부에 강할 뿐 아니라 그들의 플레이는 아름다웠다. 그들은 나의 우상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무적선수들로 무적군단이 만들어졌다. 임영철 감독에 이상은, 오영란이 선수로 뛰는 효명건설은 창단 첫해인 2004년 핸드볼 큰잔치에서 ‘싱겁게’ 우승을 차지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는 무조건 오래 뛰는 선수가 좋다. 오래 뛰는 언니들은 더 좋다. 즐기지 않으면 오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만날 맞고 한다면 오래 못한다. 언니들의 긴 선수 생명은 스포츠의 민주화를 상징한다. 물론 은퇴의 자유도 없었다. ‘88년 체제의 몰락’ 탓에 세대교체가 어려웠다. 30대 초반의 나이로, 88올림픽 때 중딩이었던 언니들. 88 꿈나무의 마지막 세대인 언니들은 ‘88년 엘리트 체육 체제’가 무너지면서 은퇴의 자유마저 박탈당했다. 세계 정상을 지켜야 하므로. 아무리 그래도 언니들은 이상했다. 즐기지 않는다면 해외까지 가지는 않을 게다. 그래서 나는 노장팀, 핸드볼팀이 좋다. 임영철 감독은 더욱 가관이다. 대표팀은 ‘세대교체’ 뒤 덴마크와 경기를 가졌다. 기자가 감독에게 물었다. “오영란이나 허영숙 같은 노장들도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시킬 생각인가?”. 대답은 간단했다. “그렇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음… 오영란의 나이가 올해 33살이니까, 2008년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니까! 벌써 나는 설렌다.
2003 세계선수권대회를 보며 세번이나 ‘허걱’거린 이유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복수혈전은 쓸쓸했다. 한국은 올림픽 1주년에 덴마크를 안방으로 불러들였고, 2번의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여자 핸드볼 이야기다. 어쩌면 허튼 짓이다. 하지만 이해된다. 그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래고 싶을 만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의 아쉬움이 컸다. 아니 원통하고 억울했다. 내 인생의 경기를 꼽으라면, 나는 그날 경기를 택하겠다. 은메달의 웃음은 올림픽의 백미!
그 경기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있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선수들의 일치단결, 백전노장들의 희생과 팔팔한 신예들의 헌신, 모든 것이 풍족한 상대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우리, 생계를 위해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할 절박한 사연,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함성을 토하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승부,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패배가 있었다. 그날의 승부는 패배로 완성됐다. 통한의 패배를 통해 달콤한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냈으므로. 언니들은 오늘도 나의 노트북 바탕화면에서 웃고 있다. 그렇다. 그날, 언니들이 웃었다. 다행히 울다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좋았다. 그 웃음은, 이제 우리도, 지면 무조건 우는 후진국 운동기계가 아니라, 져도 웃을 수 있는 자유로운 스포츠맨이라는 선언 같았다. 굿바이, 박정희 전두환! 헝그리 스포츠와 스파르타식 훈련에 보내는 아름다운 작별인사였다. (덧붙이자면, 은메달의 웃음은 아테네 올림픽의 백미였다. 장미란이 중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기고’도 멋지게 미소를 지었고, 이배영이 금메달을 놓치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마침내 한국 스포츠가 독재정권의 잔재인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정말 멋진 작별인사였다. 웃어라, 은메달!)

이상은 선수는 세계 최고의 센터백이다. 무적의 센터백은 한때 무적(無籍)의 선수였다. (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패배뒤에도 웃는 여유, 한국 스포츠의 성숙을 상징한다. (사진/ 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