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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약주엔 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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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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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민/ 학민사 대표 · 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붕어빵 속에 붕어가 들어 있지 않듯이, 약주(藥酒) 속에도 약이 들어 있지 않다. 원래 약주라는 것은 약효가 있는 것이라고 인정되는 종류의 술이거나 처음부터 특이한 맛과 향을 내기 위해 약재를 넣고 빚은 술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좁은 의미에서의 약주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술밑을 여과해 만든 맑은 술을 약주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의미가 다시 변천해 약주는 술의 높임말로도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왜 약이 들어 있지 않은데도 약주일까? 우선 약주는 귀하다. 옛날 약주는 막걸리 독에 용수를 박아 고인 맑은 술을 따로 떠낸 것이니, 막걸리 한 독에서 약주 서너되밖에 나오지 않는다. 적당한 음주는 원기를 왕성하게 하고 몸에 활기를 넣어주니 술을 약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희귀한 먹을거리일수록 몸을 보하는 약으로 여기니 귀한 맑은 술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자주 금주령을 내렸다. 일반 백성들은 가뭄이 들면 술을 빚기는커녕 삼시세끼 보리죽으로 연명하기도 어려우니 아예 금주령을 어길 일이 없겠지만, 양반층은 어떤 핑계이든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셨다. 이들은 자기가 마셔오던 맑은 술을, 술로 마시는 게 아니라 약인 양 사칭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조차 지체 높은 이가 마시는 술을 모두 약주라 부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좋은 술인 맑은 술을 약주라 해버렸다는 것이다.


약주에 대해서는 선조 때의 문신 서성(徐賂)에 얽힌 일화도 전해온다. 서성의 집에서 빚은 술이 서울 장안에서 아주 유명했는데,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지금의 중림동)이어서 좋은 맑은 술의 통칭이 약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에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했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중종 때 약현에 살았던 이씨 부인(서성의 어머니)이 남편을 잃고 술장사에 나섰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 ‘약현술집’의 술이 소문이 난 데서 약주가 유래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중종 시대는 1544년에 끝났고, 서성은 1588년에 태어났다. 곧 아버지가 죽은 뒤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약주라는 명칭은 아들이거나 어머니거나 서성 일가가 관련돼 있는 듯하다.

약주는 일제 초기까지 주로 서울 부근 중류 이상의 계층에서 마셨다. 보통 멥쌀과 누룩으로 밑술을 담그고 그 위에 찹쌀을 쪄서 덧술을 해 만드는데, 각 가정에서는 그들대로의 비법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인삼이나 그 밖의 약재를 넣어 빚어 자기 집 술을 자랑했다. 막걸리, 소주 이외에는 술이 별로 없었던 1960년대까지 약주는 고급 술로 여겨져 제법 대접을 받았다. 약주 양조장이 서울에 6개, 경기도에 20여개 있으면서 큰 호황을 누렸으나, 점차 양주, 맥주, 소주 등에 밀려 이제는 경기도에만 2개 남아 있을 뿐이다. 옛날의 영화는 모두 잃었지만, 조선시대 백일주의 명맥을 이어온 김포약주가 지금도 그윽한 맛과 향으로 ‘꾼’들의 목젖을 변함없이 적셔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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