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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농구천재 허재를 질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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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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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동욱의 스포츠 일러스트]

어찌 잊으랴 1996~97년 농구대잔치 4강전을 언제나 무참히 짓밟히던 나의 팬클럽이여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음… 그러니까 이건 커밍아웃이다. 솔직히 나, 빨간색 유니폼에 페티시(특정한 사물 등에 대한 집착) 있다. 몰랐는데, 돌아보니, 그렇다. 사춘기 때부터였다. 빨간색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비명을 질렀다. 나의 빨간색 첫사랑은 삼성전자 농구팀이었다. 때는 농구대잔치가 시작되기도 전인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그때는 ‘빨갱이’도 아니었는데 무작정 빨간색이 좋았다. 그것도 후줄근한 빨강이. 김현준의 어설픈 백보드 슛은 이충희의 깔끔한 중거리 슛에 비하면, 구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삼성팬이었다. 그리고 나의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았다. 스포츠에 대한 나의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 버전으로 말하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고, 해병대 구호로 외치면 “한번 팬은 영원한 팬이다!”


상민 오빠도 너무 미웠다

역시 빨간색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빨간색은 늘상 녹색에게 졌다. 3번 하면 2번은 졌다. 녹색 전사들의 등에는 ‘현대’가 찍혀 있었다. 나의 붉은 전사들은 치사하게 약올리고, 더티하게 몸싸움을 해야, 겨우 3번에 1번 이길까 말까 했다. 남들이 이충희 오빠에 열광할 때, 혼자서 오빠를 저주했다. 경기장을 나설 때면 기분은 더욱 우울해졌다. 나를 둘러싼 관중 3명 중 2명은 현대팬이었다. 그래도 언감생심 변심은 꿈꾸지도 않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봄날은 왔다. 이충희가 은퇴했다. 봄날은 갔다. 허재가 등장했다. 겨우 현대를 이겨도 결국 중앙대에 졌다. 또다시 혼자서 농구천재를 미워했다. 정말 미래가 까마득했다. 허재는 너무 젊었다. 이승환의 노래를 10년 넘게 중얼거렸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농구천재 허재는 농구 대통령이 돼서도 나를 괴롭혔다. 중앙대가 삼성을 이긴 것도 모자라, 기아가 고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아! 어찌 잊으랴. 1996~97년 농구대잔치 4강전을. 허재의 기아가 고대 오빠들을 울리던 날을. 내년이면, 전희철과 김병철이 대학을 졸업하는,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마지막 승부마저 마지막 패배였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은 울었다. 잘 가라, 내 청춘! 나도 울었다. 정말 울었다. 방문 꼭꼭 걸어잠그고.

혹시나 하면 역시나. 허재(왼쪽)는 혹시 지나 하면 이겼고, 김병철은 혹시 이기나 하면 역시 졌다. 그러나 김병철은 끝내 버리지 못하는 희망이었다. (사진/ 연합)

빨간색은 파란색에도 졌다. 봄철 대학농구연맹전부터 겨울철 농구대잔치까지, 역시 3번 하면 2번은 졌다. 파란 유니폼에는 ‘Yonsei’가 찍혀 있었다. ‘민족 고대’는 끝내 ‘만족 고대’가 되지 못했다. 해마다 봄이면 설다. 올해는 이기겠지. 93년에 양희승이 입학할 때도, 94년 현주엽, 신기성이 들어올 때도 그랬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안암동의 봄은 해마다 우울했다. 우울해졌다. 역시 오빠부대 3명 중 2명은 파란색 피켓을 들고 있었다. 태반은 상민 오빠 팬이었다. 때는 90년대 중·후반이었다. 내 농구인생의 달콤쌈싸름한 화양연화, 농구대잔치는 그렇게 저물었다. 나는 농구대잔치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시절이다. 내 인생에 그토록 순수한 몰입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패배마저 달콤했다.

컴퓨터 가드, 상민 오빠가 너무 미웠다.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하고 싶었다. 박빙의 승부, 그가 마지막 3점 슛을 던질 때면, 나는 눈을 감았다. 기도하는 자세였다. 눈을 감는다고 함성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십중팔구, 적중이었다. 악연은 질겼다. 상민 오빠가 연대에서 KCC로 파란 유니폼을 고수하는 사이, 나는 김병철 오빠를 따라 오리온스의 빨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영원히 섞일 수 없는 사이였다. 연대가 고대를 이긴 것도 모자라, KCC가 오리온스를 짓밟았다. 늙어서도 상민 오빠, 그놈의 인기도 식을 줄을 몰랐다. 유부남 주제에 인기투표 1등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한번 잘나가면 영원히 잘나간다. 이상민의 KCC와 허재의 TG는 우승을 번갈아 나눠가졌다. 프로농구 2001~2002 시즌에 빨간색 오리온스가 우승하는 ‘이변’도 있었으나, 2002~2003 시즌에는 질긴 악연이 되풀이됐다. 허재는 다리를 절뚝이며 오리온스의 챔피언 등극을 막았다. 정말 과거청산하기 어렵다. 허재가 은퇴하던 때, 솔직히 즐거워서 어떤 잡지에 ‘경축’ 칼럼도 썼다.

내 농구인생의 오적

오호 통재라 혹은 오호 쾌재라, 2005년 드디어 나의 적들이 한 팀으로 뭉쳤다. 허재가 TG를 버리고 KCC 감독으로 ‘배신’을 때렸다. 허재 감독에 이상민 선수라, 적들의 연합군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고? 나에게 적의 적은 적일 뿐이다. 적전 분열을 갈망한다. 과연 늙은 선수들이 젊은 감독을 고분고분 따를까? 마타도어도 뿌린다. 어제의 적들은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을까? 뭐, 그럴 수도. 팬은 영원하지만, 선수는 변하니까. 팬들이야 믿음을 먹고 살지만, 선수들이야 연봉을 먹고 사니까.

나의 레드 콤플렉스는 극복될까? 빨간색은 파란색을 이길까? 오리온스가 KCC를 이기면, 기쁨 두배 만족 백배일 텐데. 또다시 허튼 기대는 고개를 든다. 그것이 팬의 운명이다. 아참, 어제의 빨갱이 전사, 신기성과 현주엽이 자유계약선수의 자유를 얻었지. 그들이 다시 빨간색 유니폼을 입는다면, 이번에는 정말?! 글쎄….

그래도 그것이 일편단심, 붉은 마음이다.
추신. 내 농구인생의 오적을 꼽아보자. 이충희, 허재, 강동희, 이상민, 서장훈. 이럴 수가, 한국 농구 역대 ‘베스트5’는 다 모였네. 이러고도 이기기를 바랐으니 머리가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 이 칼럼은 2주에 한번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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