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부끄러움을 타던소심했던 선배, <혈의 누> 김대승 감독이 핏대를 올리며 흥분한 이야기
▣ 오지혜 / 영화배우
그는 내 대학 선배다. 난 87학번, 그는 86학번. 불과 한살 차이 나는 ‘오빠’였고, 그는 내게 대학생활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몇 안 되는 선배들 중 하나였다. 가열한 시위현장엔 언제나 그가 있었고 학내 시위현장에도 그는 항상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평상시엔 조용하고 쑥스러움도 잘 타고 마음이 무척 여린 그가 집회현장에서 보인 논리적인 말씨와 조용한 카리스마는 18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젠장, 도대체 18년이란 세월이 언제 지나갔단 말이냐).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오면 영화를 하고 싶다고 수줍게 이야기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착한(?) 후배를 꼬드겨 딸기밭에서 막걸리를 사주며 인생의 ‘썰’을 풀어대던 귀여운 선배이기도 했다.
내가 선정적이라고?
투사가 되기엔 너무나 여린 감수성을 갖고 있던 그는 자기랑 똑 닮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로 데뷔를 했다. 그 영화로 그가 신인감독상을 받았을 때 난 내가 받은 것처럼 기뻤다. 그리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나 그는 두 번째 영화를 찍었다. 첫 번째 영화가 자신의 이미지와 너무도 닮은 모습이었다면 두 번째 영화는 자신의 세계관을 그대로 아니, 처절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선정성 시비로 시끄럽단 소문을 접했기에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할 말이 많을 것 같은 그를 뻐근한 감동을 안은 채 찾아갔다. 손에서 담배와 커피를 놓지 않는 것도 18년 전처럼 여전했고 소심한 것도 여전했고 농담할 때조차 체면과 예의를 갖추는 모습까지 여전했다.
돈 많이 들어서 제작자들이 골치 아파하는 시대물을 ‘감히’ 택했을 때부터 그의 뚝심은 시작됐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 뚝심은 화면 하나하나마다 펼쳐졌다. 기대 이상의 스펙터클은 입장료를 좀더 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꼼꼼했다. 아니 화려하다는 건 그에게나 그의 영화에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 거 같다. 세심하고 꼼꼼하고 정확하다고 해야 맞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추리물에 걸맞게 박진감도 있고 스토리와 소재도 단단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제일 감동받은 것은 보는 사람의 양심을 건드리는 그의 연출이었다. 그리고 일반 관객들도 그걸 받아들였다. 체면에 관한 영화라는 것도 참으로 그다웠지만 스타일과 신선함에만 빠져 있는 우리 영화계에 진부하게 보일 위험을 감내하고 미련하게 던져놓은 그의 ‘오래된’ 진정성이 먹히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그가 선택한 ‘염치’라는 단어가 참 맘에 든다 했더니 “양심이라고 하면 너무 쑥스러울 것 같더라고” 하며 쑥스러워했다. 양심을 다뤘다고 하면 너무 엄청난 거 같은데 염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하면 덜 어색할 것 같았다는 거다.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양심은 너무나 절대적인 의미이지만, 염치라 하면 “세상의 주인은 돈이라는 걸 다 알지만 그래도 사람이 주인일 거야, 라고 믿는 그 한 가닥 믿음”이 아니겠냐는 거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 하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진정성’이란 말을 ‘사랑해’라는 말처럼 불신의 대상이 돼버려서 입에 올리기조차 불편하다고 했다. 끊임없이 자아비판을 해대면서 자기 얘길 하는 모습이 참 80년대 학번답기도 하고 18년 전 그 소심한 선배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입꼬리가 실룩실룩 올라간다.
한없이 부끄러워하기만 할 것 같던 그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까지 흥분을 한 건 이번 영화 <혈의 누>의 잔인한 몇 장면에 관한 언론의 보도에 대해 얘기할 때였다. 어느 기자가 무심코 뱉은 ‘선정성’이란 단어에 그는 곧 피를 토하고 죽을 사람처럼 억울해했다. 영화 본 얘길 잠깐 하자면 난 그 장면들(거열 장면과 닭 목을 실제로 치는 장면 등)을 보지 않았다. 보기 전부터 하도 끔찍하다는 말을 들어서 원래 그런 걸 못 보기 때문에 문제(?)의 장면이 시작될 때마다 눈과 귀를 있는 힘껏 막았더랬다. 그래도 속절없이 들려오는 효과음과 꽤 긴 시간 때문에 그 표현의 수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범인의 원한이 그대로 느껴져 몸서리가 쳐졌다.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과 기자 몇명은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선정적이라고 비판을 하는 모양이다.
“어느 감독이 사람 찢어죽는 걸 보며 좋아라 하겠느냐. 그리고 그걸 보며 즐기라고 찍었겠느냐. 그 장면의 주체는 관객이 아니라 살인자의 억울한 심정이다.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면 그렇게 끝까지 지켜봤을 거다. 잔인한 거 싫다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흥행을 위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다니 황당하다.” 그의 반론이라면 반론이었다. 자기 작품을 가지고 말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영화감독들에겐 제일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의 설명을 듣는 건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염치’ 에 관한 명상
박찬욱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감독에게 그 장면을 왜 그렇게 했냐고 따지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의미냐고 물을 수는 있지만 표현이 ‘틀렸다’고 시비 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남의 돈 수십억으로 하는 작업을 허투루 했을 리가 있겠느냐는 거다. 관객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은 있을 수 있어도 ‘틀린’ 장면이란 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백번 옳은 얘기다. 예술가의 결과물을 보고 ‘싫다’ ‘재미없다’라고 말할 순 있어도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평론가나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이기에 개인적인 감상이 배제될 순 없겠지만 논리 없는 비평, 애정 없는 비판 한마디가 그 결과물 하나를 위해 몇년을 바친 창작자에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를 명심해야 한다. 비평가와 저널리스트들은 창작자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역시 잊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지금 네티즌끼리는 그 장면들이 지나치게 잔인했다는 쪽과 주제 표현을 위해 꼭 필요했다는 쪽의 토론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정답은 감독이 필요하다면 필요하다는 거다. 싫으면 나처럼 고개를 돌려서 안 보면 그만이다. 아예 극장에 가지 말던가. 진정 잔인한 것은 죽음의 묘사가 아니라 탐욕으로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죽이는 인간의 마음인 것을. 왜 사람들은 감독이 보라는 건 안 보고 손가락 끝만 보는 걸까. 물론 예술이 ‘무엇을’보다 ‘어떻게’가 관건이긴 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술의 표현은 ‘엿장수 마음’인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언론이 선정성에 대해 시비를 건 것에 더 못마땅해했다. 선정성의 대표주자인 언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는 것이다. 찔끔할 사람들 많을 거다.
제일 중요한 삶의 기준을 물었다. 역시 염치를 지키며 사는 것이라 했다. 사건이 일어나면 따지고 드는 대신 덮느라 정신없었던 우리 현대사야말로 염치없지 않으냐면서 언젠가는 그 염치없기 짝이 없었던 우리 현대사를 영화로 찍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염치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감독의 스무살과 내 스무살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난 참 자랑스럽고 감사할 뿐이다.

김대승 감독은 "염치없기 짝이 없었던 우리 현대사를 영화로 찍고 싶다"고 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 감독. 그는 필자에게 수줍음 많은 '귀여운 선배'로 기억된다. (사진/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