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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진짜 술, 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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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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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민/ 학민사 대표 · 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날궂이라도 하는 날이면 오후부터 휴대전화 벨이 끊임없이 울린다. 한잔 하자는 전화다. 어제 저녁은 모처럼 용인에 함께 사는 고교 동창들과 어울렸다. 이제는 은퇴하고 명퇴하고 사퇴하고 조퇴하여 60줄에 들어가기 직전의 나이라,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친구들은 눈 씻고 찾아볼 정도다. 그러니 대개 부질없는 정치 분석이나 학창 시절 찧고 빻고 하던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는데, 이게 소주병깨나 비우게 하는 질퍽한 안주다.

그래서 어제도 ‘각 1병’의 굳은 약속을 저버리고 1차 각 2병에 2차 500cc 세잔으로 술자리를 마감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골이 띵하고 타는 듯한 갈증에 냉수만 여러 컵 들이켰다. 식사하면 되지, 왜 소주를 마셔야 하는가? 소주를 마셨으면 되었지, 왜 맥주로 입을 가셔야 하는가? 한번 가시면 되었지, 왜 세번이나 입을 가셔야 하는가? 아내의 빈정 섞인 다그침에 ‘내 탓’이 아니고 ‘그들 탓’으로 핑계대보지만, 어쩌랴 헝클어진 내장의 고통은 모두 내 몫인 것을!

오전 내내 이불 속에 파묻혀 이리저리 신문을 뒤적이며 육신의 평정을 기다린다. 하루를 제친 김에 자료도 찾고 원고도 쓰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다. 그런데 오전 내내 시달렸던 두통과 복통의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즐거웠던 어젯밤 친구들과의 만남만이 떠오른다. 전화하는 놈 없을까? 잘 들어갔느냐고 전화라도 해볼까? 또 술이 고파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술꾼들은 저녁 6, 7시를 ‘술시’라 부른다. 이때쯤이면 하루의 일과가 끝나서 피로와 스트레스도 풀 겸 한잔 걸치고 싶은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는 게 병이라고, 십이시 중에 유시(酉時)는 오후 5~7시인데, 술을 나타내는 한자에는 모두 ‘닭 유(酉)’ 부수가 들어가므로 유시는 곧 술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견강부회의 느낌이다. 동양에서 시를 하루가 시작되는 밤 11시부터 자, 축, 인, 묘… 순으로 2시간씩 잘라 매기다 보니 십이지의 10번째인 유(酉)가 5~7시가 되었을 뿐이다.

酉는 닭을 뜻하지만, 원래는 술을 뜻하는 주(酒)의 옛 글자다. 상형문자의 酉는 본디 밑이 뾰족한 항아리의 모습에서 나왔고, 갑골문이나 금문의 酉는 배가 불룩 나오고 입이 좁은 용기의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밑이 뾰족한 것은 침전물을 밑바닥에 모으기 편리하기 때문이며, 입이 좁은 것은 술이 증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 뒤 酉는 닭이라는 뜻 외에 ‘서쪽, 별, 익는다’ 등의 뜻으로도 확장되고, 酉에 삼수변을 붙여 만든 주(酒)가 독립적으로 술을 가리키는 글자로 굳어진 것이다.

술을 가리키는 글자로는 주(酎)도 있다. 옛날에는 酎가 흔히 쓰였는데, 어느 소주회사인가 자기 회사 소주 이름에 酒 대신 酎를 넣은 것을 본 적이 있다. 酎는 섬세한 방법으로 여러 번 덧술해 순후한 맛이 나도록 빚은 좋은 술을 일컫는 글자다. 소주 이름으로 제법 그럴듯하지만, 마셔보지 않았으니 그 소주가 주(酎)다운 주(酒)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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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민의 술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