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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느슨한 시스템이 사고를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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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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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화’ 시스템에 긴밀히 결합될 수록 위험 증가… 여분 공간이나 우회로를 만들라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우리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대개는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일처럼 귓등으로 흘리고 말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그런 사고를 당하거나 직접 근처에서 사고를 목격하기라도 하면 문득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그런 사고가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생활에 익숙해진다. 설령 사고의 위험성을 안다손 치더라도 개인으로서 조심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다짐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꺼림칙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과연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현대 기술사회의 일상적 사고는 전체적 맥락에서 따져봐야 한다. 지하철 승강장 추락사고는 개인의 부주의와 안전장치 부족, 교통 환경의 문제 등이 얽혀서 발생한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가령 지하철 승강장에서 노약자나 장애인이 떨어져 목숨을 잃거나 잃을 뻔했다는 사고 소식은 거의 정기적으로 뉴스에 보도되다시피 한다. 이런 보도가 나올 때면 늘상 승강장으로 뛰어내려 사람들을 구한 용감한 시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지만 대개 거기까지다. 한동안 지하철 승강장과 선로 사이를 가로막는 투명한 차단벽을 설치해서 원천적으로 추락 사고를 방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요즈음은 현실성이 없어서인지 그런 해묵은 처방마저도 듣기 힘들다. 따라서 고작 이것이 우리 사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지하철 추락 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한계인 셈이다. “승강장에서 누군가 떨어지면 주변에 있는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뛰어내려 구출하라. 그러면 박수갈채를 받을 것이다!”


비단 지하철 승강장 사고뿐 아니라 도로와 집을 가리지 않고 도시 전체가 온갖 사고에 노출돼 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사회학자 찰스 페로는 현대 사회가 크고 작은 갖가지 사고들을 피할 수 없는 까닭이 우리가 기술 시스템에 “빈틈없이 결합”(tightly coupled)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 따르면 사고는 비정상적이거나 일탈적인 무엇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고,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일부이다. 페로는 그것을 정상 사고(normal accident)라고 부른다. 고도 기술사회는 스스로 사고와 위험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원자력과 같은 큰 위험에서부터 개인들의 일상적인 사고에 이르기까지 관통된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첨단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가는 과정에서 사회 시스템은 느슨한 부분들을 낱낱이 제거해나가며 어느 한구석 남김없이 사회 체제에 긴박(緊縛)시키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사소한 발단에서 시작한 작은 사고일지라도 자칫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갈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시스템들은 비상시에 대비한 우회 경로나 백업 체계를 갖추지만, 항상 잠겨 있거나 쌓아놓은 물건으로 막혀 있는 비상계단으로 상징되듯이 대개의 우회 경로들은 형식적이거나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또한 시스템에 느슨한 부분들이 남아 있다면 초기의 사고를 완충시킬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 그런 여유를 상실한 지 오래다. 페로가 소개한 다음과 같은 있음직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열쇠를 잃어버린 경험 있는가

현대성이 가져온 사고의 원천은 고도 복합성의 결정체인 과학기술에 내재해 있다. 아무리 첨단 장비로 무장을 해도 비행기 추락 사고 같은 대형 참사를 막지는 못한다. (사진/ 특별취재반)

‘아파트에서 친구와 함께 생활하는 청년 존은 이상한 냄새 때문에 잠을 깼다. 동료가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끄지 않고 나가는 바람에 유리 포트가 깨진 것이다. 면접시험을 보기로 한 날이라서 마음이 조급했지만 평소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못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쓰지 않던 낡은 커피기계를 꺼내 간신히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시간에 쫓긴 존은 부랴부랴 아파트를 나섰지만 자동차 열쇠를 놓고 나온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주머니에는 아파트 열쇠도 없었다. 평소 화분 밑에 넣어두었던 예비 열쇠를 떠올렸지만 정작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가 비상열쇠를 사용하고 제자리에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급해진 그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에게 찾아갔다. 항상 낡은 자동차를 공들여 닦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저씨의 자동차는 며칠 전에 수리공장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는 버스라도 타려고 했지만, 파업으로 새벽부터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휴대전화로 콜택시를 부르려 했지만 버스 파업으로 이미 택시는 동이 난 상태였다. 발을 동동 구르던 존은 면접을 보기로 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담당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개인 사정을 봐주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로는 존에게 닥친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 단순한 인간의 실수인가(친구와 존), 아니면 기계적인 문제인가(커피포트, 자동차). 그도 아니면 환경의 문제인가(버스 파업). 그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사고를 어느 한 요소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웃어넘길 수도 있는 작은 실수가 일자리를 놓치는 큰 결과로 증폭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초기 충격을 완화하고 흡수할 만한 “느슨한 부분”들, 즉 완충 영역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파트 열쇠가 없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아파트라는 생활환경이 얼마나 각박한 공간인지 절감할 것이다. 단단한 철문은 용접기가 아니면 뚫을 수 없고, 창문을 통해 접근하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더구나 우유 투입구까지 외부침입자를 막기 위해 남김없이 막아놓았다. 스스로 철저하게 색출해낸 빈틈 덕분에 정작 본인이 열쇠를 잊었을 때 작은 실수로 일순 비상사태에 빠지게 되고, 열쇠공을 불러 강제로 문을 따는 법석을 떨고서야 자기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여분의 공간, 가치 선택의 문제

존의 사례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은 실수가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결과로 증폭되는 까닭은 우회 경로가 막히거나 완충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고도 기술사회 시스템이 그런 느슨한 부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내서 사람과 사물을 모두 시스템의 일부로 빈틈없이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의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한발을 삐끗하기만 하면 엄청난 비극으로 추락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지하철 승강장 추락 사고로 돌아가자. 과연 이 사고의 원인은 개인의 부주의인가, 안전장치의 부족인가. 아니면 노약자들이 그나마 편의시설이 되어 있는 지하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교통 환경의 문제인가. 앞에서도 보았듯이 기술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고는 어느 한 요소로 환원시킬 수 없고, 그 부분만을 분리해서 수리할 수 없다. 모든 부분들이 빈틈없이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사고들이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따라서 그 해결책은 시스템 전체의 연결을 느슨하게 만들고, 이른바 여분(redundancy)의 공간이나 우회로를 설치하는 것이다. 지하철 승강장의 선로에 이런 공간을 마련하기 힘든 것은 애당초 지하철 시스템의 설계에서 그런 공간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소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시스템 전체에 걸친 작업이기 때문에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결국 그것은 가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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