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기를 흔히 증언의 시대라 부른다.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드는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이 그 시대를 상징하듯이, 또 근대 유럽에서 소설이 시민사회를 상징하듯이, 현대는 증언이 상징적인 장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껏 역사 속에서 주체로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 무명의 사람들, 역사라는 맷돌에 짓이겨진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개인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증언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분이 일본군 위안부로서는 처음으로 1991년 얼굴과 이름을 밝히며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다. 재일학자 서경식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 전쟁 피해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때까지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억압당하던 ‘증인’들이 일제히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 이전의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새로운 사태”라는 것이다.
이렇게 증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냉전의 종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또한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세계 도처에서 상당히 진전된 민주화도 이름 없는 피해자들이 당당히 나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만 세계화한 것이 아니라, ‘회개의 세계화’ 또는 ‘사죄의 지구화’가 이루어지면서 각 나라별로 또는 나라 사이에 과거청산 문제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이다. 한편에서는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나 동독의 슈타지의 문서고를 열어젖혀 사회주의 국가의 비밀경찰기구의 죄행을 밝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 정권이 시민사회를 상대로 자행한 ‘더러운 전쟁’을 파헤쳤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박해 등 과거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회개 움직임도 있었다. 얼마 전 선종한 요한 바오로 2세는 2003년 3월 ‘기억과 화해: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역사적 문서를 발표토록 했다. 그는 사순절 예배에서 ‘용서의 날’ 미사를 거행하며 그리스도인들의 분열, 진리에 봉사한다는 미명 아래 폭력 사용, 타 종교 신봉자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적대 행위 등에 관해 용서를 청했다.
냉전 종식과 민주화의 분위기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과거청산의 움직임이 다양한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다. 민주화는 어느 정도 발전을 보았지만,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냉전이 과거의 영역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은 어쩌면 아직 증언의 시대조차 제대로 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략 100만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경우 유족회에 나와 피해를 증언하는 유족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방송에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지만, 실제 유족들 상당수는 ‘아직도 말할 수 없다’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한 권인숙은 폭로 뒤에도 끔찍한 꼴을 당했다. 독재권력은 권인숙을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 좌경극렬 용공분자로 매도했다. (사진/ 한겨레)
사실 피해 당사자들이 증언을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것이 꼭 권력이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간신히 재워놓은 기억을 불러내 죽도록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다시 대면하는 것 자체가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치욕스러웠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니! 이 글을 쓰는 오늘도 국정원 과거 사건 문제와 관련해 고문 피해자 한 분을 면담했는데, 수십년 전 그 순간에 가까이 갈수록 목소리가 떨리고, 손이 떨리고, 끝내는 눈물을 떨구셨다. 그런데 가해자쪽은 기억의 창고에서 아픈 기억을 그냥 불러내는 것도 힘겨워하는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한번 못을 박는다. 그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홀로코스트도, 난징대학살도 다 없었다. 강제로 끌려간 ‘종군위안부’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 돈 벌러 제 발로 간 매춘부들이다.” 이들은 과거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용기를 내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불러낸 증언자들에게 돈 뜯어내려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의 과거를 들어낸다거나, 가짜라느니, 일본을 모함하려는 북한 공작원이라느니 하면서 갖은 험담을 늘어놓는다.
고발로서의 증언을 죽이는 비열한 수법은 증언의 시대가 열린 요즈음의 일만은 아니다. 1985년 김근태가 다시 고문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폭로를 고문 기술자의 친구들은 ‘엄살’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비슷한 무렵 잡혀갔다 나온 사람들은 “진짜 많이 당한 사람들은 입도 뻥끗하지 않는데, ‘별로’(!) 당하지 않은 김근태가 엄살떤다”라는 취조관들의 음산한 말을 전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한 권인숙은 폭로 이후에도 참으로 끔찍한 꼴을 당했다. 독재권력은 권인숙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 좌경극렬 용공분자로 연일 매도했다.
이렇게 가해자들이 피해 당사자의 증언조차 죽여온 사회에서 가해자쪽의 반성이나 고백을 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체 숫자를 헤아리는 것조차 쉽지 않도록 수가 많은 친일파 중에서 자신의 과거를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친일행위에 대해 고백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 없이 두루뭉술하게 그 시절의 잘못을 인정한 정도면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나마 아주 양심적인 고백을 한 셈이 된다. 친일파들이 분단정권의 주축이 되어 국가권력을 장악해가는 상황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고백과 반성은 좌익에 대한 투항이요, 우익 진영의 약화를 가져오는 반역행위였다. 과연 대한민국 수립 초기에 남쪽에 남은 사람들 중에 자신이 태어나보니, 또는 철들어보니 일제가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시절 학교 다니며 배운 대로 행동한 것이 해방되고 생각해보니 그것도 민족 앞에 죽을 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정상적인 사회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들이 살기등등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한 고백과 회개는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하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양계장’같은 엉뚱한 고백만이…
이제 광주민중항쟁도 25주년을 맞지만, 아직 우리는 광주의 진상을 모른다. 처벌도 하고 보상도 했다지만, 정작 발포 명령이 누구에 의해 내려져 어떤 계통을 통해 전달됐는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두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고 하늘을 찌르는 기념탑을 세우고 막대한 보상금을 풀었지만, 정작 죽은 사람들만 있지, 죽인 사람은 없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막힌 논리를 내세우며 전두환 일당의 무장반란을 조사하지 않던 검찰이 따가운 국민 여론에 못 이겨 소환장을 발부하자 전두환은 1995년 12월2일 자신의 졸개들을 병풍처럼 둘러세운 뒤 집 앞 골목에서 그 유명한 ‘골목성명’을 내며 버텼다. 스산한 겨울비를 맞으며 전두환은 ‘갑자기’ 5·18특별법을 제정한 김영삼을 겨냥하면서 “만일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세력과 야합해온 김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라며 호기를 부렸다. 이렇게 반성이나 고백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구국의 결단’을 옹호한 전두환은 그 뒤 10년이 지난 지금 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되면서 쿠데타 과정에서 보여준 ‘단호함’과 ‘추진력’으로 팬클럽까지 만들어가며 인기를 누린다는 어이없는 소문이다.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연방 죄송하다고 굽실거리며 눈물까지 찔끔대던 노태우는 돈도 거의 다 추징당하고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 밖의 인물이 되어버린 반면, 전두환은 “내 전재산은 29만원뿐”이라고 버티며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
100만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이 다 자살했던 것이란 말인가? 죽은 사람은 즐비하건만, 죽인 사람은 없다. 100만의 죽음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고백하지 않은 것이 한국 사회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의 진상 규명과 사죄를 추구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 과정에서 몇몇 참전용사들의 소중한 고백이 있었지만, 같은 참전군인들의 비상한 ‘전우애’와 압력 때문에 일부는 증언을 번복하기도 했다. 2000년 6월에는 이 문제를 집중해서 다뤄온 한겨레신문사에 참전군인 수천명이 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처벌도 하고 보상도 했다지만 우리는 아직도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모른다. 1988년 광주항쟁 청문회 장면. (사진/ 한겨레)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치료약
관련자들의 고백이 없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난 시기에 자행한 국가폭력에 대해 반성하는 과거청산 작업은 어렵지만 이루어질 것이다. 사안에 따라 남아 있는 자료의 질과 양에 차이가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선 가해자를 상당한 수준에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국제형사법에서 인도(humanity)에 관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지만, 현재의 국내 정세에서 처벌을 포함해 가해자의 책임 문제를 가리는 작업은 진실 규명 이상의 새로운 과제와 갈등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모델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현재진행형의 갈등에 대해 가해자쪽에서도 수습과 타협과 조직적 퇴각의 의지가 있었던 남아공과, 가해자쪽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고, 사과하지도 않고, 피해자들과 화해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빨갱이 잡다가 좀 실수한 게 뭐가 잘못됐느냐고 뻗대는 한국의 상황은 너무나 다르다. 진짜 고백할 사람들이 하지 않으니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양계장 사건처럼 엉뚱한 사람이 나서 엉뚱한 고백을 하여 믿는 사람을 닭으로 만들어버린다.
가해자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은 당혹스럽고 또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전두환처럼 당당하게 버티는 흉물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또 그런 마음을 달래려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애국이고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돌이켜보니 흘러간 내 젊음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나 성당에 나가 마음을 달래보려 하지만, 예수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뒤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태복음 5:23-24)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느 종교이든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는 나치 국가의 거대한 국가범죄와 그 악의 조직에 빠져들어가 국가범죄의 하수인이 된 인간의 개인적 책임을 어떻게 문제삼을 것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윤리적 과제로 제기됐다. 나치 국가를 쳐부수고, 그 구성원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문제였다. 한국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친일파와 그 계승자들이 장악했던 국가를 혁명의 방식이 아니라 한발한발 민주화해서 드디어 국가로 하여금 과거의 국가 폭력에 대해 사죄하도록 한 한국에서는 직·간접으로 국가범죄에 간여한 개인들의 문제를 단지 공소시효 만료에 기대지 않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책임을 져야 할 국가가 건재하고, 또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국가범죄에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공안기관원이었고, 그들은 모든 비밀은 무덤까지 안고 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충성을 바쳤던 국가도, 그리고 기관도 모두 과거의 기관원들에게 고백해줄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다. 몇몇 특수한 사건은 당사자들이 고백을 안 하면 진실 규명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많은 사건의 경우 가해자들의 고백 없이도 사건의 진상에 근접할 수 있을 만큼 자료가 남아 있다. 고백을 하여 진실 규명에 협조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처리는 처벌, 사면, 구상권 행사, 역사 기록에서의 처리 등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잊고 싶은 과거가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고통이 피해자가 당한 고통보다 크지는 않다. 지금 고백이 필요한 정말 중요한 이유는 고백이 치료약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서 고통에 허덕이는 피해자들에게 당신의 고백은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다. 억만금을 보상금으로 준다고 해도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가해자의 고백으로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피해자와 국가를 향한 고백은 비록 당장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가해자와 그 후손들이 고백 없이 이름이 밝혀질 때 입을 상처를 막아주는 예방약이 될 것이다. 왜 내가 고백해야 하는가, 왜 나여야 하는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아직 당신의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양심이 수십년 전 당신에게 얻어터지며 왜 나인가, 왜 내가 고문당해야 하는가를 수백번도 더 물어야 했던 피해자의 질문에 아주 늦게나마 천천히 응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양심을 피하지 말라
고백하면 바보가 되고 고백을 거부한 자는 떵떵거리고 사는 이 땅에 윤동주라는 청년이 잠깐 다녀갔다. 그의 절절한 시 한수.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지금 이 땅에서 고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윤동주의 ‘참회록’을 고백을 하지 말라는 말로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늘 떨리고, 늘 서투를 수밖에 없는 고백, 나는 지난 시기의 국가폭력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기 당대의 부정적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는 길은 스스로의 고백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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