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물의 오싹함에서 한 걸음 나간 ‘사실적 공포’의 미학 <거북이도 난다>
▣ 이성욱/ <씨네21> 기자 lewook@cine21.com
썩 훌륭한 비유 같지는 않지만, <거북이도 난다>를 볼 때 접하게 되는 이중의 느낌은 호러 영화를 즐기게 하는 효과와 겹쳐볼 수 있을 듯하다. 호러 장르를 찾는 이들은 심리적 공포이든 시각적 공포이든 오싹한 전율이 동반하는 드라마의 긴장과 이완을 즐길 터이다. 무서움과 쾌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일으키는 호러의 특징 때문인지 이 장르는 열광적이나 상대적으로 소수의 팬층을 거느린다. <거북이도 난다>는 첫 장면부터 고통스럽다. 어린 소녀가 아찔한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지려는 게 역력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게 분명해 보이는 소녀의 표정은 연기라고 느끼기 힘들 만큼 절망적이다. 어떤 사연도 들려준 게 없지만 어쩐지 공포스럽고 아찔하다. 그 순간 다가오는 또 하나의 느낌은 소녀를 둘러싼 안개 낀 공기와 삭막해서 오히려 처연한 절벽이 조화를 이루며 발산하는 기묘한 아름다움이다. 이건 그만큼 촬영과 연출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거북이도 난다>의 어린 소년, 소녀가 실제로 겪었거나 충분히 겪음직한 현실은 너무나 무시무시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싶지만 동시에 이를 미학화하는 영화적 재능이 자꾸 스크린을 향해 눈을 치뜨게 만든다. 호러의 공포라는 건 즐거움을 위한 인공적 재현이라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거북이도 난다>의 공포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영화적 쾌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은 몹시 당황스럽다. 그러니까 <거북이도 난다>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명확히 갖고 있는 선동적인 영화이지만, 과거의 리얼리즘 영화라는 너무도 괘를 달리하는 작품이다. 빈번히 등장하는 멋진 판타지 장면조차 사실성을 증폭하는 데 기여하면서 공포감을 배가한다. 데뷔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바흐만 고바디는 현실에 분노하는 그 크기만큼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데 기막힌 재능을 갖고 있다. 그 치환 과정에서 분노와 비판의 에너지를 조금도 손실하지 않는다는 건 더 큰 놀라움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얼마 두지 않은 한 국경 마을의 실질적 지도자는 위성이란 소년이다. 자기가 거느리는 소년들에게 지뢰를 캐오게 해서 이를 팔고 그 돈으로 위성 안테나를 사서는 뉴스를 필요로 하는 마을의 어른에게 되판다. 마을 곳곳에 묻혀 있는 지뢰는 후세인과 부시로부터 온 것이지만 아이들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무슨 약초 캐듯 지뢰를 파내서는 삼태기에 담아 그들에게 되판다. 이 지뢰들은 또 다른 이웃에 의해 되묻힐 것이다. 어른들의 전쟁에서 어떻게 이권을 챙겨야 하는지 아는 영악한 위성의 눈에 한 소녀가 꽂힌다. 첫 장면에 등장했던 예쁜 소녀 아그린. 하지만 얼굴은 차디차게 식어 있다. 지뢰에 양팔을 잃은 오빠와 업어 키워야 하는 어린 아이를 동반한 그녀의 과거는 악몽이다. 부모를 죽인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낳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아그린은 아이와 자신의 목숨을 틈나는 대로 없애고 싶어한다. 이 소녀를 좋아하게 된 위성은 이상한 예지 능력을 가진 소녀의 오빠와 다투면서 가까워지는데 전쟁은 코앞으로 닥쳐온다. 이란의 쿠르드 지역에서 태어난 바흐만 고바디는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한 뒤 2주일 뒤 그곳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위험한 전후 국경지대를 돌며 이 영화를 찍었다.

<거북이도 난다>의 어린 소년, 소녀가 실제로 겪었거나 충분히 겪음직한 현실은 너무나 무시무시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싶지만 동시에 이를 미학화하는 영화적 재능이 자꾸 스크린을 향해 눈을 치뜨게 만든다. 호러의 공포라는 건 즐거움을 위한 인공적 재현이라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거북이도 난다>의 공포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영화적 쾌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은 몹시 당황스럽다. 그러니까 <거북이도 난다>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명확히 갖고 있는 선동적인 영화이지만, 과거의 리얼리즘 영화라는 너무도 괘를 달리하는 작품이다. 빈번히 등장하는 멋진 판타지 장면조차 사실성을 증폭하는 데 기여하면서 공포감을 배가한다. 데뷔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바흐만 고바디는 현실에 분노하는 그 크기만큼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데 기막힌 재능을 갖고 있다. 그 치환 과정에서 분노와 비판의 에너지를 조금도 손실하지 않는다는 건 더 큰 놀라움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얼마 두지 않은 한 국경 마을의 실질적 지도자는 위성이란 소년이다. 자기가 거느리는 소년들에게 지뢰를 캐오게 해서 이를 팔고 그 돈으로 위성 안테나를 사서는 뉴스를 필요로 하는 마을의 어른에게 되판다. 마을 곳곳에 묻혀 있는 지뢰는 후세인과 부시로부터 온 것이지만 아이들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무슨 약초 캐듯 지뢰를 파내서는 삼태기에 담아 그들에게 되판다. 이 지뢰들은 또 다른 이웃에 의해 되묻힐 것이다. 어른들의 전쟁에서 어떻게 이권을 챙겨야 하는지 아는 영악한 위성의 눈에 한 소녀가 꽂힌다. 첫 장면에 등장했던 예쁜 소녀 아그린. 하지만 얼굴은 차디차게 식어 있다. 지뢰에 양팔을 잃은 오빠와 업어 키워야 하는 어린 아이를 동반한 그녀의 과거는 악몽이다. 부모를 죽인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낳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아그린은 아이와 자신의 목숨을 틈나는 대로 없애고 싶어한다. 이 소녀를 좋아하게 된 위성은 이상한 예지 능력을 가진 소녀의 오빠와 다투면서 가까워지는데 전쟁은 코앞으로 닥쳐온다. 이란의 쿠르드 지역에서 태어난 바흐만 고바디는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한 뒤 2주일 뒤 그곳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위험한 전후 국경지대를 돌며 이 영화를 찍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