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이항] 사무치게 그리운 멋진 친구여

552
등록 : 2005-03-2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의사로서 연극연출가로서 영화배우로서 순수함과 열정을 보여주었던 이항 박사님을 추모하며

▣ 오지혜 / 영화배우

얼마 전 난 친구 하나를 잃었다. 나의 그 친구는 내 친구 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배도 제일 많이 나왔고 술도 제일 센 친구였다. 그리고 그는 의사이면서 딴따라인 희한한 친구였다. 한국에서도 나이 육십이 넘은 한국 남자와 삼십대의 젊은 여자가 멋진 술친구가 될 수 있다는 신나는 경험을 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현직 의사이면서 어느 딴따라보다도 연극·영화 활동을 많이 하고 연극 무대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친절했고 누구에게나 힘이 되는 칭찬만 하는 사람이었고 의사로서도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었던 그가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대학로 연극인들이 다 접시 물에 코를 박고 반성해야 될 정도로 훌륭한 공연을 만들어내는 그의 연출 실력을 보고 언젠가는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에 모시고 싶다 했더니 감히 자신이 어떻게 딴따라가 될 수 있겠냐며 하지만 무척 영광일 거라고 겸손해하던 그를 뒤늦게 이렇게 지면으로 모시게 돼서 마음이 먹먹하기 그지없다.

브라보! 변함없던 커튼콜의 그 환성


경기고등학교 연극반은 서울고등학교 연극반과 함께 아마추어 연극단체로서는 그 역사와 자리매김의 영향이 가장 단단한 단체다. 그 단체가 화동 연우회라는 극단을 만들어서 프로 연극인들 기를 팍팍 죽인 지 몇년째. 신구, 이근희, 한진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배우들과 김광림, 김민기, 최용민 등 실력 있는 연극인들이 모여 있는 극단 화동 연우회에서 그는 회장으로 연출로 그리고 정신적 지주로 믿음직한 무게중심을 잡고 있었다. 한 8년 전쯤인가 그가 연출한 <이것들이 레닌을>이란 연극을 보고는 그의 뛰어난 연출 솜씨에 반했고 몇년 뒤 다시 그가 연출한 <나비의 꿈>이란 연극을 보고 의사이면서 연극을 그토록 제대로 만들어내는 그의 실력에 질투를 느끼기까지 했다. 그리고 뒤풀이 자리에서는 그의 인격과 품성에 반했드랬다.

<안녕,형아> 촬영 현장에서 후배들과 함께. 왼쪽은 배종옥씨, 오른쪽은 필자.

참 즐겁게도 얼마 뒤엔 그가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서는 그도 나의 팬이 되어서 우린 만날 때마다 서로 팬이라며 웃었다. 지난해 내가 어머니와 한 연극 <잘 자요 엄마>를 보러 와서는 그의 친구 부부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연극과 인생을 얘기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내가 여태 신나게 얘기한 사람들이 머리 하얀 ‘꼰대’였다는 생각에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어떤 얘기에도 ‘어른인 척’ ‘의사인 척’을 하지 않고 젊은 우리들의 다소 좁은 시야의 세상 이야기에도 고개를 주억거려주고 너무나 겸손한 자세로 연극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했드랬다.

그의 수많은 딴따라 지기들은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을 할 때 객석에서 “브라보!!” 하는 환성이 들리면 ‘아! 그가 와줬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그 많은 공연의 객석을 매번 지켜주고 연출과 기획을 하고 심지어는 영화 출연까지 하는데도 진료시간엔 어김없이 어린 환자들 곁에 있는 그를 보고 딴따라 지기들은 혹시 쌍둥이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순수함과 열정은 의사로서도 어김없이 보여줬다. 소아혈액종양학을 전공하고 한양대학교 소아과 과장을 맡고 있는 그는 우리나라 소아암 백혈병 치료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불우한 환경의 어린 환자들에게 치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직접 그를 훌륭한 의사로 느낄 수 있었던 건 오는 5월에 개봉할 영화 <안녕, 형아>를 찍으면서였다. 나는 아픈 아이 엄마 역할이었고 그는 실제의 자신과 똑같은 소아암 전문의사 ‘이항 박사’로 특별 출연해서 전문적인 장면에 대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촬영에 앞서 실제 환우들과 그 가족들의 상황과 처지를 알기 위해 몇번의 캠프를 가졌드랬는데 그에게 아이를 맡긴 부모들이 갖는 믿음과 신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고 두텁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아픈 아이들의 부모들과 가족 같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그를 보면서 참 좋은 의사구나 하고 감동했드랬다.

<안녕, 형아>를 촬영할 당시 그는 연극 <만드라골라>에도 출연 중이었다. 그러면서 진료도 쉬지 않는 초인적인 힘을 보여서 우리가 ‘나이롱 의사’라고 놀리기도 했는데, 극중 내 아들녀석이 숨을 거두는 신을 찍느라 밤샘 촬영이 있던 어느 날 내가 그에게 왜 소아과를 택했냐고 물었다. 의사는 남을 돕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는 소아과가 제일 ‘의사 같아서’였다고 대답하는 그가 너무나 멋져 보였다. 그리고 왜 이렇게 몸을 무리해가면서까지 연극을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다. 원래 의대생일 때부터 연극을 광적으로 좋아하기도 했지만 보름에 한명꼴로 자기 손에서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일은 의사가 아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스트레스라면서 일이 아닌 예술에 미쳐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 거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불가능했으리라. 아이의 죽음을 부모에게 알리는 일은 30년 동안 해오지만 매번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그의 속내를 들으면서 그에게 연극을 연출하고 영화에 출연하는 일은 구원과도 같은 것이겠구나 싶었다.

5월이 되면 스크린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안녕, 형아>에서 자신과 똑같은 소아암 전문의사 '이항 박사'로 특별 출현한다.

지난달 25일. 라디오 녹음을 하러 가던 중 그의 부음을 들었다. 화가인 그의 아내는 지방에 있는 작업실에 있어서 화를 면했지만 집에서 혼자 잠을 자던 그는 전기누전으로 불이 나는 바람에 연기에 질식해서 쓰러졌고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너무 놀란 난 차에 비상등을 켜놓고 아무 데나 주차를 한 뒤 정신없이 울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그가 출연한 연극을 보러 갔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황망한 정신으로 어렵게 녹음을 마치고 빈소에 달려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의 어이없는 죽음을 기막혀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가버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았고 대부분이 그의 술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우린 이렇게 큰 술자리가 있는데 이항 선생님은 어디서 뭘 하시기에 안 오시냐고 농을 던지며 울다가 웃다가 절망했다.

그곳에서 우리 또 술 먹어요

의사의 죽음을 슬퍼하러 온 조문객의 반 이상이 딴따라였고 육십대 노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술친구의 반이 이삼십대 젊은이들이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 앞에 서면 자신이 썩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와도 친구였고 딸에게도 친구였고 까마득히 어린 우리들에게도 좋은 친구였던 그는 그렇게 믿을 수 없으리만큼 어이없게 우리 곁을 떠났다. 의학계로 보나 연극계로 보나 그는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 ‘젊은이’였다.

“선생님, 저 지혜예요. 그곳에서도 술친구 많이 만드셨나요? 먼저 간 어린 친구들과는 다시 만나셨나요? 거기서도 그 아이들 잘 돌봐주실 거죠? 선생님. 얼마 전에 제가 한 신문에 의사들 너무 불친절하고 권위적이라고 흉봤는데 선생님 같은 의사도 있다는 말을 쓰지 않은 게 너무 후회돼요. 용서해주실 거죠? 나중에 우리들도 그곳엘 가게 되면 우리 또 술 먹어요. 저는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사랑밖에 난 몰라> 많이 불러드릴게요. 우리들 다 갈 때까지 좋은 자리 잡아놓고 기다려주세요. 보고 싶어요. 선생님. 편히 쉬세요.”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