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축제의 1960년대를 돌아보는 두 개의 시선, 영화 <몽상가들> <69 식스티나인>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역사에도 청춘이 있다면, (서구) 현대사의 꽃 시절은 60년대였다. 60년대는 희망의 연대, 청춘의 시절이었다. 스푸트니크호가 희망을 상징했다면, 비틀스는 청춘의 상징이었다. 60년대는 저항의 연대였다. 히피들은 꽃을 꽂은 채 마리화나에 취했고, 성난 청년들은 바리케이드에 화염병을 꽂았고,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휘날리며 담배를 피웠고, 동성애자들은 커밍아웃을 선동하며 거리를 누볐다.
파리의 스무살들과 나가사키의 고교생들 60년대는 축제의 계절이기도 했다. 청춘들은 고다르의 영화에 열광하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꿈꾸었다. 저항의 열기는 ‘68혁명’으로 폭발했다. 대중매체가 청춘의 시절을 돌아보고, 혁명의 연대를 회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시절을 돌아보는 두편의 영화가 3월25일 동시에 개봉했다. 혁명 세대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과 혁명후 세대인 재일한국인 이상일 감독의 <69 식스티나인>이다. <몽상가들>은 1968년 파리, 스무살의 봄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시네마테크에서 시작해서 거리투쟁으로 끝난다. 파리의 미국인 어학연수생 매슈(마이클 피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쌍둥이 남매 이자벨(에바 그린)과 테오(루이스 가렐)을 만난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 해임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스무살 동갑내기들은 인사를 나눈다. 시네필(영화광)인 그들에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해방공간’이었다. 셋은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워진다. 남매는 테오를 집에 초대하고, 부모가 휴가를 떠나면서 셋은 함께 살게 된다. <69>는 1969년 일본 나가사키, 17살의 여름을 돌아본다. 그해 일본 나가사키 사세보항에는 미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입항해 있다. 한해 전에는 엔터프라이즈호 입항에 반대하는 거센 시위가 있었다. 사세보북고 3학년 켄(쓰마부키 사토시)은 동급생 야마다(안도 마사노부)와 랭보의 시를 통해 가까워진다. 재미있게 살 방법을 모의하던 켄과 야마다는 학교를 점거하기로 한다. 저항과 반전의 시대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탓이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켄은 우드스톡을 들먹이고, 베트남전 운운하지만 사실은 같은 학교의 여학생 마츠이(오오타 리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켄 일당은 학교 봉쇄에 성공하지만, 정학을 당하게 된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의 동거는 파국에 이른다. 젊은 몽상가들이 영원히 자기들만의 방에 갇히려는 순간, 거리의 돌이 창문을 깨고 날아든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 혁명에 동참한다. 매슈는 말리지만 이자벨과 테오는 바리케이드를 향해 달려간다. 베르톨루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목소리를 빌려 <아뇨,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거리의 바리케이드로 달려가는 테오와 이자벨의 뒷모습은 불안하기만 하다.
저항은 동양에서 키취가 되었나
<69>는 아예 정치를 비웃고 축제를 찬양한다. 켄이 꿈꾸는 혁명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중충한 체육복에 갇힌 여고생들의 몸을 구출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재미있게 사는 게 이기는 것”이다. <69>에는 68세대에 대한 조롱도 곳곳에 숨어 있다. 켄 일당은 학교를 점거하면서 교장 책상 위에 ‘일’을 본다. 켄은 일을 보는 후배에게 “똥에도 사상이 있냐?”고 비아냥거린다. 켄은 전공투 대학생들이 그들을 지도하려 하자 페인트를 끼얹기도 한다. <69>는 페스티벌의 욕망을 긍정하고, 투쟁의 당위에 냉소한다. 하지만 매스게임과 운동장 청소를 강요하는 학교 질서는 그들의 저항을 ‘정치화’한다.
프랑스 청년의 저항은 아주 사적인 형식을 취하지만, 일본 청년의 저항은 집단의 형식을 띤다. 아니 띨 수밖에 없다. 폭력적인 교사와 억압적인 학교제도는 그들을 집단 저항으로 내몬다. <69>의 ‘고딩’들은 교무실을 에워싸고 ‘매스게임과 운동장 청소 폐지’ 전리품을 얻어낸다. 고도자본주의와 유교 문화가 충돌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탓에 <69>의 저항은 결국 <몽상가들>보다 사회적이고 격렬할 수밖에 없다. 원래 제복의 저항이 무서운 법이다. 억압이 동일한 만큼 단결도 거세다.
68혁명은 아버지에 대한 반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영화의 기성세대에 대한 묘사도 관심사다. <몽상가들>의 테오에게 아버지가 적이라면, <69>의 켄에게 적은 교사다. 시인인 테오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성명이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썼지만, 이제는 기성세대가 돼버렸다.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한다. 아버지는 대꾸하지 못한다. 휴가에서 돌아온 테오와 이자벨의 부모는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뒤엉켜 자고 있는 자식들과 친구를 보고 호통을 치는 대신 조용히 수표를 써두고 집 밖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몽상가들>의 부모는 쓸쓸하고 쩔쩔매는 이미지로 남는다. <69>에서 교사는 아버지를 대신한다. 규율과 질서의 수호자다. 체육복 차림으로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문제아들을 때려잡는다. <69>의 고딩들은 교사들과 맞서면서 단련된다. 같은 68혁명의 자장 안에 있었지만, 서양과 동양의 차이도 드러낸다. 서양 아이들은 혁명의 문화를 향유하지만, 동양 아이들은 그 문화를 동경한다. 그것은 마치 ‘오리지널’과 ‘짝퉁’의 차이처럼 보인다. <69>의 모든 것은 키치적이다. 그들이 꿈꾸는 페스티벌은 우드스톡을 흉내낸 것이고, 그들이 실행한 학교 점거는 프랑스 5월혁명의 복사판이다. 켄 일당은 학교 건물에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대학 진학을 거부하라” 같은 선동문을 휘갈기지만, 그것은 스타일을 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일탈이 주는 유쾌함은 남는다. 아무리 키치의 난장판이라도, 일장춘몽이라도 청춘의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68혁명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다.
파리의 스무살들과 나가사키의 고교생들 60년대는 축제의 계절이기도 했다. 청춘들은 고다르의 영화에 열광하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꿈꾸었다. 저항의 열기는 ‘68혁명’으로 폭발했다. 대중매체가 청춘의 시절을 돌아보고, 혁명의 연대를 회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시절을 돌아보는 두편의 영화가 3월25일 동시에 개봉했다. 혁명 세대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과 혁명후 세대인 재일한국인 이상일 감독의 <69 식스티나인>이다. <몽상가들>은 1968년 파리, 스무살의 봄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시네마테크에서 시작해서 거리투쟁으로 끝난다. 파리의 미국인 어학연수생 매슈(마이클 피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쌍둥이 남매 이자벨(에바 그린)과 테오(루이스 가렐)을 만난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 해임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스무살 동갑내기들은 인사를 나눈다. 시네필(영화광)인 그들에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해방공간’이었다. 셋은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워진다. 남매는 테오를 집에 초대하고, 부모가 휴가를 떠나면서 셋은 함께 살게 된다. <69>는 1969년 일본 나가사키, 17살의 여름을 돌아본다. 그해 일본 나가사키 사세보항에는 미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입항해 있다. 한해 전에는 엔터프라이즈호 입항에 반대하는 거센 시위가 있었다. 사세보북고 3학년 켄(쓰마부키 사토시)은 동급생 야마다(안도 마사노부)와 랭보의 시를 통해 가까워진다. 재미있게 살 방법을 모의하던 켄과 야마다는 학교를 점거하기로 한다. 저항과 반전의 시대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탓이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켄은 우드스톡을 들먹이고, 베트남전 운운하지만 사실은 같은 학교의 여학생 마츠이(오오타 리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켄 일당은 학교 봉쇄에 성공하지만, 정학을 당하게 된다.

(사진 왼쪽)이 60년대 배경을 '빌려온' 청춘영화라면, <몽상가들>은 68세대 감독이 회고하는 68년을 담고 있다.

파리에서 베를린, 프라하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와 도쿄까지, 60년대 세계의 성난 젊은이들은 기성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화와 자유를 요구 했다. (사진/ Rex featur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