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들기는 10대들의 놀이문화이자 표현방식… 입시를 위한 부모의 욕심, 지역편차 극복해야
“랜더링 해봐.”
“이 장면을 디졸브로 처리해보는 건 어때?”
해석도 난해한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깡총머리를 묶은 여학생과 더벅머리 남학생 둘이다.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수염 덥수룩한 감독과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모여 앉아 ‘머리를 쥐어짜는’ 편집실에서 이들은 디지털 편집기를 가지고 ‘놀고 있는’ 중이다. 옆방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가 주위의 친구들에게 들이대며 ‘장난을 치는’ 소년도 있다. 지난 겨울 문을 연 하자의 영상작업장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거나 편집작업을 하는 10대들로 북적이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 됐다.
“영화를 하는 건 수다를 떠는 것”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예술가와 전문가 몇몇의 ‘성역’인 영화만들기가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놀이문화’가 돼가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색색깔의 펜으로 장식을 한 시와 수필을 묶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중고생들이 8mm 캠코더와 6mm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하는 건 주위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거라고 생각해요.” 교복을 입은 최수희(17, 영훈고2)양은 ‘피를 토하는 예술’을 서슴없이 ‘수다’로 내려앉힌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논리적으로 잘 풀어나가지 못하면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논리적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작업이죠.” 최양은 중학교 때 캠코더가 있는 친구와 어울려 카메라를 처음 만져봤다. 그때 친구들과 만들었던 작품은 “내가 보기에도 엉망진창이었지만” 카메라의 매력에 빠져 지난해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작 워크숍을 찾아다니며 영화를 배우고 있다. “꼭 영화감독이 되겠다거나 제가 만드는 작품들이 미래를 위한 습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제가 말하고 싶은 것들, 말이나 글로는 더 이해받기 어렵잖아요. 영화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최양은 편집작업을 하면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어른들이 치는 ‘뻥’도 알게 됐다”고 한다. 카메라를 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을 수동적인 우중으로 만드는 ‘미디어 조작’의 위험성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것이다.
올해 수능시험을 본 황정욱(18)군은 아버지가 장롱 안에 모셔둔 8mm 캠코더를 몰래 꺼내 동생과 함께 ‘가지고 놀면서’ 영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고1 때 영화감독을 꿈꾸는 짝과 둘이서 영화동아리를 만들어 시나리오를 쓰고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방북 때 친구들과 벌였던 ‘아이들의 통일논쟁’을 영상으로 옮긴 <우리의 소원을 통일>, 동성애를 소재로 다룬 <소유>에 이어 성폭력을 소재로 만든 <카오스>가 얼마 전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제 생각을 말이나 글보다는 영상으로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나리오를 짜고 콘티를 만들고 나중에 편집을 하면서 머릿속에 둥둥 떠나니던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뽀뽀뽀>를 통해 세상과 처음 만나고 <비트>나 <초록물고기>를 통해 다른 세상을 알게 된 10대들에게 영상은 이제 문자를 통해 이어지는 사고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의 표현방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늘고 있는 청소년 대상의 영상제작 워크숍에는 연필처럼 카메라를 만지는 청소년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전교조에서 만든 참교육영상집단에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10대들만 1800여명에 이른다. 2∼3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카메라 드는 것을 마뜩찮아하던 학교에도 방송반을 중심으로 한두대씩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가 비치되고 있다. 특별활동반으로 영상제작반을 만들거나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학교도 늘고 있다. 올해 특별활동으로 영상제작반을 만든 중앙중학교의 이정원 교사는 “아이들이 카메라를 만지거나 카메라에 찍히는 데 스스럼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직 수련회나 체육대회 등 학교행사를 담거나 아이들과 토론을 통해 3∼5분짜리 간단한 영상물을 만드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공동작업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고 인터넷 채널에 성과물을 올리면서 아이들이 부쩍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을 짧은 시간이지만 절감한다”고 이야기했다.
98년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라는 놀라운 작품으로 ‘캠코더 키드’의 발칙함을 일찍이 세상에 알렸던 영파여중 방송반의 지도교사인 김종현 교사는 “아이들은 카메라에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가 됐다”면서 “이제 ‘좋은 프로그램 보기’식의 수동적인 미디어 교육이 아니라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영상물을 소화하고 만들어내는 좀더 적극적인 미디어 교육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제안했다. 캠코더에 익숙해지는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아이들이 영상으로 고민하는 영역도 훨씬 넓어지고 있다. 부산에서 '목간'이라는 영화동아리를 만들어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부현도씨는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학교폭력이나 왕따 등 학교내부 문제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이 몰려 있었지만 최근에는 동성애나 미디어 등 아이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영역이 다양화되고 그 고민의 수준도 매우 깊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받자 주의’ 우려도 깊어
아이들의 영상표현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넘쳐나고 있는 현상은 이미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됐지만 이와 함께 에너지가 입시제도의 새로운 출구로 변질하는 것에 대한 염려도 늘어나고 있다. 대학입시에서 영화제 수상이 가산점으로 인정받으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들이 저마다 아이들에게 고급카메라를 안겨주고 있는 것도 청소년 영상문화의 새로운 현상이다. 최근 몇몇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한 학생의 경우 인터뷰에서 600만원에 달한 제작비를 부모에게서 지원받은 사실을 고백해 영화제 관계자들을 씁쓸하게 했던 일도 있다. 고등학교에 영상제작 출강하고 있는 하자센터 영상작업장의 장주원씨는 “학교쪽이 학생들의 영상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많은 교사들이 이를 통해 ‘스타’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고 우려했다.
아이들의 욕구에 비해 튼실한 영상교육의 공간이 서울, 부산 등 일정지역으로 불균형하게 편재돼 있다는 점도 하루빨리 개선돼야 할 문제로 지적된다. 98년부터 비경쟁인 고딩영화제를 주최하며 중·고딩 영상제작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청소년미디어센터의 민영국씨는 “최근 청소년영화제가 늘어나면서 이벤트 중심으로 청소년의 영상제작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 ‘상받자주의’만 늘어나게 하는 꼴”이라고 비판하면서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영상물 제작을 배우고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안정적인 교육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씨는 또한 “아무리 캠코더가 일반화했다고는 하지만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처럼 대중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의 아이들은 카메라 한대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니다 창작 의욕마저 꺾이는 것이 현실”이라며 “독립영화집단 등 단체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영상제작교육이 교사와 시민단체, 청소년 단체 등이 연계할 수 있는 생활권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사진/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의 영상작업장 편집실. 두개의 모니터 위에 뜨는 화면이 잘게 쪼개지기도 하고 동그란 아크리스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박승화 기자)
“영화를 하는 건 수다를 떠는 것”

사진/제3회 서울국제청소년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황정욱군의 <카오스>.

사진/아이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역도 교육 문제에서 동성애, 미디어 등 넓어지고 있다. 청소년 동성애자에 관한 다큐멘터리 <愛>(김주형 연출).

사진/서울 YMCA회관에서 진행되는 중·고딩 영상제작 워크숍.(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