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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화의 마력에 잠 못 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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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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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게임에서 부활한 신들과 영웅의 투쟁… 가장 오래된 이야기와 가장 새로운 오락이 만나다

(사진/인간으로 태어나 신이 된 영웅 헤라클레스. 게임 <제우스>는 헤라클레스의 여정을 게임으로 변형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 제우스의 아들로 태어난 탓에 여신 헤라의 분노를 사 자신의 운명과 싸우고, 결국엔 신이 된 남자. 인간이 영웅이 되고 마침내 신이 된다는 것만큼 매혹적인 이야기가 있을까? 2세기 말 로마황제 코모두스는 헤라클레스에 매혹된 나머지 아랫사람들을 괴물로 분장하게 하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헤라클레스가 된 기분을 맛보고자 사람을 칠 필요가 없다. 이미 신화는 우리가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고도 자본주의가 만든 상품 중 가장 최정상에 있는 것, 게임이 바로 그것이다.

상징성과 보편성의 매력

미국의 게임제작사 임프레션에서 11월 말 출시한 <제우스>(Zeus:Master of Olympus)는 인간이 영웅이 되어 신과 싸운다는 헤라클레스의 모티브를 100% 활용한 작품이다. 플레이어는 평범한 인간. 이 인간은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등 열두명의 신들 중에 한 신을 선택해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선택한 신이 주는 혜택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히어로스 홀(Hero’s Hall)에서 영웅을 키워내야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게임계에서 특히 사랑받는 소재다. 국내 출시준비중인 미국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인빅토스> <앤션트 컨퀘스트> <제우스>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빅토스>는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포세이돈, 제우스 등이 유닛의 수장으로 설정되어 있다. <앤션트 컨퀘스트> 역시 고대 그리스시대를 배경으로 한 해상전 게임이다.

신화의 상품화에는 일본도 뒤지지 않는다. 구루마다 마사미의 만화가 원작인 게임 <세인트 세이야>(聖鬪士星矢)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이 게임에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의 신이 바다 건너 먼 나라인 일본인에게 재림한다는 과감한 발상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아테네가 있었듯이 현대 일본에는 사오리라는 여성이 있는데, 그녀가 아테네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이 여성을 위해서 그라드 재단이라는 단체에서는 100명의 소년을 어릴 때부터 훈련시킨다. 이 소년 중 한명이 되어 교황(제미니 사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 지하의 신 하데스 등과 싸운다는 게 이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사진/사냥하는 아르테미스 석상. 캐릭터의 뚜렷한 개성 때문에 그리스신화는 게임소재로 많이 애용된다)
이처럼 신화가 게임의 콘텐츠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신화관련 저서를 펴낸 신화연구가 이윤기씨는 신화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신화는 그것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상징성이 있다. 어떤 것에 ‘헤라’라고 이름 붙여버리면 ‘질투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이미 전파되어 있어서 그것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신화는 또한 보편성이 있어서 어떤 긴 이야기든지 짧게 설명하기 쉽다.” 이러한 신화의 특성 때문에 신화는 롤플레잉게임(RPG)의 소재로 많이 쓰인다. 롤플레잉게임은 게임의 특징상 가상의 공간과 선명한 캐릭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신화는 동시에 제공한다.

롤플레잉게임에서 그리스 신화 못지않게 애용되는 신화는 북유럽 신화다. 북유럽 신화에서도 헤라클레스와 비견할 만한 장사가 있으니 그가 토르다. 여기에 거짓말쟁이 신 로키, 지옥의 여왕 헬 등 음산한 캐릭터들이 곁들여진다. 이 세계는 신들의 나라 아스가르드, 죽은 자의 나라 니블헤임, 불꽃의 나라 무스펠스헤임, 거인의 나라 요툰헤임 등 아홉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아스그라드에 살며, 가끔 요툰헤임과 충돌을 일으킨다. 세상의 끝 라그나뢰크가 오면 큰 전투가 일어나 모든 신과 거의 모든 인간족이 죽는다. 그 이후에는 신들이 부활하고 새로운 세대의 인간들이 태어난다. 이처럼 장쾌한 서사구조 때문에 북유럽 신화는 일본 스퀘어사의 <파이날 판타지> 등 많은 롤플레잉게임에 부분부분 이용되었다. 롤플레잉게임에 북유럽 신화를 이용하는 경우가 하도 빈번해, 일본의 게임평론가 다케루베 노부아키는 북유럽 신화에 관한 책을 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여러 신화들을 게임에서 접하다보면 “서양 신과 동양 신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호기심이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다. 일본에서 만든 <여신전생> 게임 시리즈는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구약 여신전생>은 서양의 악마와 일본 건국신화의 신이 싸우는 이야기다. 세기말, 루시퍼를 따르는 교단이 생기자, 루시퍼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의 신이 평범한 여고생에게 강림한다. <여신전생> 시리즈 중 하나인 <여신전생 데빌 사마나>에서는 우리나라 귀신도 출연해 눈길을 끈다. 90년대 중반 출시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립탐정으로, 악마소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서고금의 모든 신과 악마가 소환되는데, 이들은 주인공의 동료 내지는 무기로서 기능한다. 이중에 우리나라의 ‘도깨비’가 끼여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귀신이 물 건너 일본에서 상품화된 예이다.

머털도사를 모니터에서 만나보라

(사진/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전설에 신화적 요소를 가미해 만든 <바람의 나라>. 만화 원작을 게임으로 만들어 인기를 모았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 귀신을 모셔다가 상품화하느라 분주한 동안 우리나라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설에 신화적 요소를 가미해서 상품화한 게임 <바람의 나라>(엔씨소프트 제작)가 그 대표작이다. <바람의 나라>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전설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여기에 주작, 현무, 청룡, 백호 등 신수(神獸)들과 인간을 사랑해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천녀 이야기까지 섞어넣어 신화적 요소를 가미했다. 출시된 지 4년이 되었지만 김진 원작의 만화 <바람의 나라>에 기반한 아름다운 캐릭터와 쉬운 구성으로 인기가 높다.

올 들어 신화를 게임으로 재생산하는 국내의 움직임은 더욱 두드러진다. 올 하반기 출시되어 정보통신부 주최 ‘신소프트웨어상품대상’을 받은 <머털도사 2천년의 약속> 역시 우리 고유 캐릭터인 머털도사와 함께 한국 고대신화 속의 환웅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콧잔등 부근에 흉터가 있어 코를 가리고 다니는 머털도사는 만화, 애니메이션으로도 많은 인기를 모은 토종 캐릭터다. 최근 국내 게임제작사 갓핑거스에서 내놓은 온라인 게임 <신들의 전쟁>(Gods and Wars)은 아예 서양의 전쟁신 아레스가 동양의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걸어 동서양 신들이 일대 격전을 벌이는 것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신화 속에서 레다, 이오, 칼리스토 등 여러 여자와 관계해 영웅들을 탄생시킨 제우스는 게임 속에서는 멍청한 바람둥이로 그려지고, 자만심 때문에 에로스를 무시해 보복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아폴론은 왕자병 환자,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해장국을 좋아하는 술꾼으로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사진/주신 제우스와 게임 캐릭터로 만든 제우스.게임에서는 여자만 아는 바람둥이로 묘사된다)

환웅에 대해서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상세하지 않아 성격을 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강력한 힘을 가진 동방신으로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설정되었다. 유화 부인을 꼬셔서 알을 낳게 한 것으로 유명한 해모수는 온화한 성품이지만 가끔 신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이뿐 아니라 산신령, 옥황상제, 삼신할미 등 신화의 영역에 넣기 힘든 인물들까지 게임캐릭터로 재생산되었다.

신화연구로 정평이 난 영문학자 도정일 교수(경희대)는 “신화에는 현실의 억압을 잊고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도피주의적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신화나 설화는 가장 오래된 서사로서, 대중화에 가장 용이한 이야기 구조와 인물유형을 가지고 있다. 조금만 변형하면 얼마든지 재창작이 가능한 모태적(母胎的) 구조다”라는 점도 지적한다. 가장 오래된 서사의 속성이 가장 현대적인 상품과 부합된 것이다.

죽여도 다시 살아나 신들에게 도전하는 영웅들, 그것 역시 언제든지 껐다 켜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의 속성과 상통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전뇌공간에서 신이 되는 이 시대, 신화는 지금 컴퓨터 속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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